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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강종원 (한밭대학교)
저널정보
백제학회 백제학보 백제학보 제22호
발행연도
2017.1
수록면
79 - 105 (27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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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백제 사비기 軍事 運用體系의 변화양상을 통해 황산벌전투의 배경을 검토한 것이다. 사비기 백제의 군사조직은 행정구역을 근간으로 하여 지방관인 方領·郡將이 군사지휘관적 성격을 겸하고 있었다. 그런데 무왕·의자왕대에 와서 신라 영역내 거점성 공략방식과 중앙군단 중심의 운용이 이루어지면서 군사력의 분산과 지역 방어체계의 약화를 초래하였다. 그 결과 方·郡·城의 軍管區로서의 성격이 약화됨으로써 신라의 선제적이고 국지적인 침략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게 되었다. 신라의 경우 각 지역 군·성 등의 행정구역 주민을 징발, 편성하여 외부 적의 침략방어와 같은 국지전에 활용함으로써 중앙의 정예군을 온전하게 유지할 수 있었지만 백제는 중앙군단 중심의 군사력 운용으로 정예군의 감소와 빈번한 戰役에 따른 국론분열과 사기저하, 그리고 방·군·성의 지방통치체제에 근거한 각 지역중심의 방어체계가 약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660년 나·당군 침략시 신라군은 탄현을 넘어 황산벌로 진격하였는데, 신라군이 탄현방면으로 진격한 배경은 당시 백제-신라간 국경선의 변화 등을 통해 살펴볼 수 있었다. 황산벌전투가 벌어진 연산지역은 신라와의 관계에서 군사적으로 후방에서 최전방이 되어 변경지대로 전락하게 되었으며, 신라 5만군이 백제의 감시를 피해 탄현을 통과할 수 있었던 것도 東方 지역의 대부분이 신라의 통제 아래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신라 5만군을 막는데 5천의 군사밖에 동원하지 못한 사실은 당시 백제 중앙 중심의 군사력 운용과 대외방어, 군사 동원체제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특히 황산벌 전투가 2일에 걸쳐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군사적 원조를 받지 못한 것은 당시 동방 지역 방어체계의 약화에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황산벌전투에는 좌평 관등의 충상·상영, 달솔의 계백이 함께 출전하였는데, 계백이 총사령관이었다. 관등이 낮은 계백이 총사령관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東方의 方領이었고, 5천 결사대의 대부분이 동방 소속의 상비병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황산벌전투는 지형의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최후의 결전은 벌판에서 벌어졌다. 이는 당시의 군사적 상황이나 전략이 부족한 충상과 상영이 신라군의 황산벌 진입에 대한 위기의식에 서 전면전을 펼치도록 영향력을 행사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추정된다. 결국 황산벌전투는 사비기 군사 운용체계의 변화로 군사동원 및 방어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군사력의 부족과 지휘체계의 혼선으로 인한 대응실패로 인해 패배한 것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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