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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용태 (동국대학교)
저널정보
동아시아불교문화학회 동아시아불교문화 동아시아불교문화 제36호
발행연도
2018.1
수록면
299 - 321 (23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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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임진왜란의 의승장 사명 유정(1544-1610)에 대한 조선후기 불교계와 유학자의 인식과 민간에 전승된 이미지의 대중화 과정을 살펴보았다. 사명은 청허 휴정의 적전 제자로서 당대 불교계를 대표하는 위상으로 인해 그의 법맥을 이은 사명파는 17세기까지 주류 문파의 위치를 점했다. 사명파는 18세기 이후 금강산과 영남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유지했지만 최대 문파로 부상한 편양파에는 미치지 못했다. 1738년 사명을 향사하는 밀양 표충사의 사액사원 지정을 청원한 태허 남붕은 자신이 사명의 법손임을 표방하고 관련 기문을 모은 『분충서난록』을 간행하였다. 하지만 그의 스승 설송 연초는 편양파의 법맥을 이었기에 태허는 스승이 편양파의 선과 사명파의 교를 모두 통합했다는 계보 인식을 표명해야 했다. 사명에 대한 유학자들의 인식은 의승장 활동과 일본에서의 외교적 교섭에 대한 높은 평가로 나타났다. 『분충서난록』에는 그에 대한 유학자들의 인식과 충의에 대한 찬탄이 담겨있다. 이를 반영하여 18세기에는 밀양 표충사를 시작으로 1789년 해남 표충사, 1794년 묘향산 수충사가 국가로부터 사액되었고 공식 향사가 이루어졌다. 민간의 전승에서도 사명의 이미지는 영웅적 서사의 확대 재생산으로 나타났다. 17세기 전반의 기록에는 임진왜란 당시 사명이 행했던 비범한 행적이 수록되었다. 17세기 후반부터는 일본에 사행을 갔을 때의 기이한 이야기가 추가되었는데 수많은 이본으로 나온 소설 『임진록』에서는 왜왕을 굴복시키고 위정자를 징계하는 민중의 영웅으로 사명을 묘사하였다. 이처럼 조선후기 사명대사 인식은 충의의 사표에서 구국의 영웅으로 승화되면서 대중적으로 확산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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