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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한나 (국립중앙박물관)
저널정보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한국민족운동사연구 한국민족운동사연구 제86호
발행연도
2016.1
수록면
103 - 150 (4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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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1910년에서 1930년에 이르는 시기에 최창식(1892~1957)의 행적을 바탕으로 국내와 상해지역의 민족주의활동과 사회주의활동 과정을 살펴보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그는 1911년에 경성에서 김좌진과 함께 서간도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위한 군자금 모집에 관여한 것을 시작으로 1912년부터는 오성학교 역사교사로 재직하면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3ㆍ1운동 당시에는 국내대표단으로 남경ㆍ상해ㆍ북경에 파견되어 독립운동가들과 중국혁명당원들을 대상으로 선전활동도 했다.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도 참여하며, 국무원비서장ㆍ의정원의장ㆍ국무원내무장 등을 역임할 만큼 임정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임정 활동을 하면서 그는 1920년 5월 상해 한인공산당에 입당하여 사회주의자가 되었고, 이후 이동휘계열과 대립하면서 상해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원이 되었다. 1921년 6월부터는 고려공산청년단 상해회의 집행위원장을 맡는 등 사회주의 활동을 활발히 전개해나갔다. 이뿐 아니라, 이동휘가 임시정부를 떠나면서 임시정부 내의 모든 사회주의세력이 탈퇴했을 때에도 최창식은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계열의 사회주의자로서 임정에 남아 끝까지 민족통일전선을 위해 활동했다. 그의 민족통일전선운동은 크게 6ㆍ10만세운동과 독립운동촉진회의 설립, 홍진 내각의 결성,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의 활동으로 나누어진다. 그는 임시정부 중심의 민족통일전선운동에 중점을 두었는데, 임시정부를 개조하여 임시정부 안에서 통일전선운동이 실현될 수 있도록 노력했다.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 해체 이후, 최창식은 三一印刷所를 개인적으로 인수하여 생계를 유지를 했으나, 사회주의와 민족주의세력 모두의 인쇄물 간행을 맡음으로써 민족통일전선을 위한 노력은 계속해 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는 사회주의 선전인쇄물을 압수당하면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3년 중역의 판결을 받고 1930년 4월 상해에서 국내로 송환되었다. 그는 임시정부활동을 하면서 동시에 사회주의 활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한 유일한 인물이다. 무엇보다도 최창식은 1920년대 후반 민족통일전선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으며,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로 분열된 독립운동을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통합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다시 말해서 독립운동을 성공시키기 위해 독립전선을 통일해야 함을 주장했고, 독립전선을 통일하기 위해서는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창식은 독립을 위해 사회주의를 받아들였고 끊임없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통합을 추구한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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