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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박미선 (조선대학교)
저널정보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감성연구 감성연구 제16호
발행연도
2018.1
수록면
209 - 232 (2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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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의 혼례는 황제의 가계 계승뿐만 아니라 당시의 국가관과 세계관을 반영한 국가의례로서 국가의 정통성과 정치적 상징성을 드러낸다. 1906년은 절망과 희망의 두 감정이 공존하고 있던 시기였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조인된 후, 1906년 3월 일본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한국에 부임해 왔다. 이로써 통감부에 의한 일본의 한국 지배가 피부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한제국의 독립성을 대내외에 알리기 위해 고군분투한 고종황제와 그 측근 세력들이 존재했다는 점에서 일말의 희망이 공존하고 있던 시기였다. 망국이라는 절망과 주권회복 및 자강이라고 하는 희망이 교차하던 바로 이 해, 황태자의 혼례가 진행되었다. 황태자 혼례는 전통적 혼례 방식을 유지하는 한편 황제국 의례의 활용을 통해 황실의 유구성과 독자성을 드러냈다. 근대 일본의 경우에도 황실의 계보와 국가의 유구성을 나타내기 위해 고대적 의례 형태를 유지하거나 발명한 경우가 있었다. 또한 대한제국은 황태자 혼례에서 황제국의 의례보다도 격을 높인 의례를 발명하여 독립국가로서의 위상을 되새겼다. 아울러 군대와 경찰을 배치하여 서구와 같은 근대적 공권력의 권한이 고종황제와 근대국가 대한제국에 있음을 표상화하였다. 물론 혼례를 통해 대한제국의 근대화와 독립성을 공동체 구성원들이 얼마나 느끼고 있었는가 하는 점은 쉽게 일반화 할 수 없다. 다만 당시의 혼례에 대한 신문의 논설에서, 망국의 길목에 선 조선 인민의 군주에 대한 민의 애정과 존경이 투사되어 나타나고 있었다. 또한 황태자의 혼례를 통해 대한제국 황실이 새롭게 시작되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1906년 황태자 혼례는 절망과 희망이 혼종된 애처로운 현실의 공감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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