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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성훈 (부산박물관)
저널정보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미술사와 시각문화 미술사와 시각문화 제25호
발행연도
2020.1
수록면
132 - 183 (5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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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正祖, 재위 1776-1800)는 1791년에 비공개로 군복본 어진 대본(大本) 1본과 소본(小本) 1본을 제작한 뒤에 이 두 본을 규장각과 현륭원(顯隆園)의 재실에각각 봉안하였다. 현륭원은 정조의 부친 사도세자(思悼世子, 1735-1762)의 묘소이다. 이 두 본의 어진은 모두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이 중 대본은 〈철종어진〉과거의 동일한 도상의 초상화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정조가 자신의 초상화를 부친의 묘소 재실에 둔 것은 선왕(先王) 영조(英祖, 재위 1724-1776)가 자신의 어진을 냉천정(冷泉亭)에 봉안한 사례를 따른 것이었다. 냉천정은 영조의 생모인 숙빈최씨(淑嬪崔氏, 1670-1718)의 사묘(祠廟)인 육상궁(毓祥宮)의 재실이다. 정조는 자신의 어진을 현륭원 재실에 봉안함으로써 마치 자신이 부친을 옆에서 시위(侍位)하는 듯한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효과를 내고자 하였다. 부친에 대한 자신의 효심(孝心)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자 한의도도 내보였다. 그런데 더욱 주목되는 사실은 이 재실에 정조가 군복을 복색(服 色)으로 한 어진을 두었다는 사실이다. 정조는 군복을 무엇보다 자신의 부친 사도세자가 온행(溫行) 중 수원에 들렀을 때 착용했던 옷으로 기억하였다. 그 결과 그는 수원에 위치한 현륭원을 방문할 때는 반드시 군복을 착용하였다. 군복본 정조어진 속 군복은 이처럼 사도세자에 대한 정조의 효심과 계승 의지가 투영된 상징물로 해석될 수 있다. 이 논문에서 필자는 다음의 두 가지 중요한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그중 첫번째는 조선시대에 어진의 제작과 봉안이 각각 따로 진행된 별개의 사업이 아닌서로 연계되어 진행된 것이었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정조가 자신의 전임(前任) 국왕들과는 달리 자신의 어진을 후대에 영원히 남겨야 할 이른바 공적인 보존대상으로만 인식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신의 내면의식과 정체성 혹은 개인적인 염원을 드러낼 수 있는 매체로 분명히 인식했다는 사실이다. 즉, 그가 부친에 대한 추모의 마음을 표현하고 자신을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계승자로서 당당히 표방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써 초상화란 매체를 적극 활용했던 사실을 필자는 이 연구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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