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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성혜 (부산대학교)
저널정보
사단법인 퇴계학부산연구원 퇴계학논총 퇴계학논총 제36호
발행연도
2020.1
수록면
203 - 226 (2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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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구의 유학은 중국 복건성 민인 36성과 명청 교체기에 유구로 건너온 네 명의 학자에 의해 토대가 마련되었다. 쿠메마을은 처음 유구로 건너온 민인 36성이 모여 산 곳으로 이른바 유구 한학의 시발지이다. 네 명의 중국학자도 이곳에 거주했다고 보인다. 유구의 유학 계보와 학통은 둘로 나뉜다. 하나는 쿠메마을계이고 다른 하나는 수리왕부계이다. 쿠메마을계는 유구 유학이 시작된 곳일 뿐만 아니라,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유구 유학을 대표한다. 공자묘와 명륜당도 이곳에 설립되어 사실상 유구 유학의 메카였다. 그러나 이곳은 중국에서 건너온 사람들과 그 후손들로 형성된 곳이다. 즉, 唐學계보이다. 그러므로 18세기 말, 젊은 尙溫王은 王城이 있는 수리에 官生 후보자를 육성하기 위한 國學을 설치하는 내용을 포함한 관생제도개혁을 단행했다. 말할 것도 없이 쿠메마을에서는 극심한 저항을 하는 등, 이른바 관생소동을 일으켰다. 관생제도개혁이 의미하는 것은 쿠메마을에서 독점하던 文敎와 敎權이 수리로 넘어간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의 권위를 당할 수는 없었다. 이른바 수리왕부의 國學계보가 성립되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해서 1798년, 유구 왕성이 있는 수리에 公學校所가 창건되었고, 이는 1801년에 국학으로 改稱되었다. 그리고 이곳에 상온왕 자필의 「海邦養秀」라는 편액이 걸렸다. 이후 수리출신이 관생으로 파견되면서 수리왕부에 의한 국학계보의 유학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는 유구 역사의 결과로 보면, 매우 늦었다. 수리에 국학이 설립된 지, 채 100년도 되기 전인 1879년에 일본 메이지정부에 의해 琉球處分되면서 유구왕국이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지기 때문이다. 여기에 유구처분되기 이전의 소용돌이 상황까지 생각하면 수리의 국학에서 차분하게 유학자를 기르고 배출한 시기는 더욱 짧다. 따라서 수리 출신의 儒子들은 쿠메마을 출신보다 적고, 업적 역시 많지 않다. 하지만 왕부가 끝나기 전, 수리에 국학을 설립하고, 수리 출신의 유학자를 배출하여 왕부의 자존심을 세운 것은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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