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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정욱재 (독립기념관)
저널정보
영남퇴계학연구원 퇴계학논집 퇴계학논집 제27호
발행연도
2020.1
수록면
41 - 70 (3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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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안순환이 1932년에 설립한 조선유교회의 성격을 재검토한 글이다. 기존 연구는 친일과 반일의 관점에서 지나친 이분법적인 분석을 통하여 각각 조선유교회를 친일단체와 민족운동단체로 규정하였다. 그로 인해 당시 조선유교회가 지녔던 다양하고 역동적인 역사적 실상이 감추어지는 아이러니를 낳았다. 경학원에 참여한 일제협력유림과 조선유교회 명교학원에 참여한 개신유림은 모두 유교를 중시하였지만 그 지향은 매우 달랐다. 전자는 일제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협력 수단의 유교로 전시체제기에 ‘황도유학’으로 연결되었으며 1939년에 결성된 조선유교연합회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후자는 일제에게 협력하지 않았으며 전시체제기에도 조선유도연합회에 참여하지 않고 ‘獨善其身’을 선택하였다. 일제 통치가 허용하는 합법적인 틀 내에서 조선인의 사회적 권익과 정치적 지위를 개선하려는 활동은 상황에 따라 일제에 대한 저항이 되기도 하고 협력이 되기도 하는 것처럼 조선유교회는 어쩌면 유림에 대한 ‘식민지의 회색지대’일 수도 있다. 이미 국가가 망한 상황에서 조선 유교의 ‘道’를 수호하고자 하는 조선유교회 관계자들의 열망이 일제협력유림 외에 다른 유림의 동참을 불러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나마 곡부 공자묘 위문 사업을 비롯하여 유림이 일시적이나마 자기 목소리를 내고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 것이 1930년대 전반기 조선유교회의 의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조선유교회와 그 주요 인물들에 대해 본격적으로 정밀한 연구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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