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성환 (경기도박물관)
저널정보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민족문화연구 민족문화연구 제89호
발행연도
2020.1
수록면
205 - 242 (38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무신집권기 이후 왕실의 연기업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고, 산천비보도감?重房堤로대표되는 무신들의 연기업이 중방을 중심으로 실행되었다. 무신들은 문신과의 관계에서 항상 우위를 확인하려 했고, 무신이 관련된 건물?관청의 地氣를 비보하는 방법도그중에 하나였다. 하지만 고종 3년(1216) 거란유종의 침략은 서반의 연기업에 일정한전환을 가져오게 했다. 위기감을 가진 최씨정권이나 왕실 모두 그 관계를 더욱 긴밀하게 관리할 필요가 있었다. 결국 최선의 연기업은 무신집정자 권력 아래에서의 왕실 유지였다. 최충헌은 흥왕도감의 설치하고, 성종의 眞殿이었던 乾元寺를 부수어 액막이했으며, 백악에 새 궁궐을 짓는 등 거란 침입을 기양하여 왕실연기업을 실행하였다. 몽고 침략으로 고종 19년(1232) 6월 전격 추진된 강화 천도는 연기업의 방법과 장소에 근본적인 재검토를 수반했다. 고종 21년에는 扶?山에서 갈라진 좌소 阿思達로비정된 옛 양주 땅에 남경 가궐을 지어 어의를 봉안했고, 개경 수창궁에 太祖神御를 봉안하여 어의와 함께 4개월을 단위로 개경과 남경에 교차 봉안하는 연기업을 실행했다. 국왕이 개경과 남경에 친행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주나라 8백년 왕업이 고려왕조에 지속될 것을 염원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조치는 고려왕실의 永業地였던 부소산 좌곡이도참에서 좌소 백악, 단군전승에서 고조선의 도읍지[길지]인 백악산아사달과 융합되면서 좌소 아사달로 비정되는 결과에 따른 것이었다. 전쟁의 수습책으로 몽고가 강도에서의 출륙과 국왕 친조를 제시함으로서 이를 타개할 또 다른 연기책이 모색될 필요성이 있었다. 백승현의 延基業이 부각된 것은 이에따른 것이다. 그 내용은 앞 시대에 추진되었던 三蘇에서 연기궁궐 조성과 비교할 수있는 혈구사?삼랑성?신니동에서 이궁?가궐 창건, 어의대 봉안, 문수신앙을 배경으로 밀교와 도교가 섞인 법화경 법석과 대일왕도량?대불정오성도량 개최였다. 하지만고종 45-46년 추진된 연기업은 고종의 승하로 혈구사에서 대일왕도량과 법화경 법석개최만 이루어졌고, 삼랑성?신니동에서의 가궐 조영과 불교도량 설행은 개최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은 원종 5년(1264) 국왕의 몽고 친조에 대한 무사귀환을 목적에서삼랑성가궐을 중심으로 재추진되었다.

목차

등록된 정보가 없습니다.

참고문헌 (0)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