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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변동명 (전남대학교)
저널정보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호남학 호남학 제69호
발행연도
2021.1
수록면
1 - 78 (7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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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에서 통일신라에 이르는 사이의 무등산을 광주 지역사회와 연관시켜 검토하였다. 광주의 역사적 흐름에 비춰 무등산을 조망함으로써, 이 산과 관련된 사람들의 지난날을 훑어보며 그 면모의 일부나마 드러내는 것을 겨냥하였다. 먼저 無等山의 名號를 광주의 고을 명칭과 연결지어 다룸으로써 이 산을 광주 지역사회와의 관련 속에서 이해하는 발판을 마련한 다음, 이어서 無等山信仰과 無等山歌 그리고 開仙寺址 石燈을 소재로 삼아 주로 통일신라시기의 무등산 내지는 그로써 표상되는 광주 지역사회의 움직임을 더듬어 헤아렸다. 無等山은 늦어도 통일신라 이래 武珍岳이라 불렸다. 무등산이라는 명호가 등장한 것은 고려시기에 들어서였다. 무진악과 무등산은 同語의 異表記로 간주하는 게 보통이다. 그 독음과 의미를 두고는 견해가 대립하는데, ‘무돌뫼’ 혹은 ‘무들뫼’로 달리 읽으면서 각각 ‘무리지어 모인 돌[石]의 산’ 혹은 ‘물[水]이 있는 들녘의 산’으로 풀이한다. 그런데 ‘武’의 일본어 독음인 ‘다케(たけ)’에서 ‘독’[石]이 연상된다. ‘武珍岳’을 ‘독돌뫼’로 읽고 그 의미를 ‘石石山’으로 새기면, 동일어를 중첩해 복수형을 표시한 것으로 이해하여 ‘돌들로 이루어진 산’이라는 풀이가 가능하다. 산마루의 장대한 암석군이 돋보이는 이 산의 명호로서 제격이거니와, 그러한 무진악이 景德王의 漢化政策과 고려왕조의 성립이라는 변화를 거치면서 武等岳(山)을 거쳐 無等山으로 정착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광주의 옛 이름으로는 武珍州가 대표적이다. 무진악에서 유래하였거니와 아마도 백제에서는 武珍郡이었던 듯싶은데, 통일신라에 들어 무진주가 성립하면서 고을의 주된 명호로 자리를 잡았다. 광주의 다른 옛 이름인 奴只는 냇물이 흐르는 들녘을 연상시킨다. 광주의 옛 이름들이 무등산 및 그 앞의 들녘에서 유래한 바, 그곳을 터전으로 삼아 온 지역민의 삶을 표상한다는 점에서 자못 함축적이다. 아울러 고을의 주된 명호가 무진주라는 점에서 무진악 곧 무등산이 광주 지역사회를 상징하는 존재임을 확인할 수가 있기도 하다. 무등산신앙은 광주 일원에서 전해오는 민간의 풍속으로서, 무등산을 주재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산신을 숭배하는 전통 관습이다. 광주의 유력한 토착세력을 상징하는 전통시기의 정치적이며 사회?문화적인 습속이었는데, 통일신라에서는 그러한 무등산신앙을 小祀에 편제하여 중앙의 규제를 받도록 정하였다. 왕경을 중심으로 일원적인 통치체제를 정비하는 일환이었는데, 광주의 토착세력은 신라 중앙의 그러한 정책에 꽤나 협조적이었다. ‘무진고성’(무등산고성)의 축조라든지 그 결과 탄생한 무등산가에 함축된 광주 지역사회의 동향에서 헤아릴 수가 있었다. 신라의 백제 병합으로 신라 중앙과 접촉을 시작한 이래, 광주의 토착 유력계층은 중앙귀족에게 협조하는 타협의 길을 걸었다. 중앙귀족과의 연계를 발판으로 삼아 광주를 이끄는 전통적인 유력 사회계층으로서의 위치를 다지며, 나아가 노령 이남에서 토착세력을 대표하는 위상을 확보하고 또 지켜나가고자 하는 게 통일신라시기 광주 지역사회의 선택이었다. 이후 9세기 前半에 이르도록 광주 지역사회의 그러한 방침은 대체로 일관되고 유효하게 작동하였다. 무등산신앙과 무등산가를 더듬어 광주 지역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무등산의 존재 의미를 되짚었거니와, 이 산이 광주나 다름없는 상징적 존재임을 거듭 확인할 수가 있었다. 9세기 말엽 광주에 甄萱의 後百濟가 들어섰다. 신라 중앙과 타협하고 중앙귀족에게 협조하던 지역 토착세력이, 기왕의 고식적인 방책을 버리고 왕경 경주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자세력으로 자립하였다. 무등산 開仙寺址 石燈의 銘文에는 그처럼 이제까지와 다른 길을 선택하기에 이른 광주 지역사회의 분위기가 담겨 전한다. 진성여왕 5년(891) 10월 무렵 새겨진 石燈記에 의하면, 開仙寺라 전하는 사찰에서 토지를 매입하는 佛事에 국왕이나 왕실은 관여하지 못하였다. 신라 중앙의 경우도 기껏해야 관여했을 가능성이 짐작되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국왕이라든지 신라 중앙에서는 해당 佛事에 가능한 한 참여해야 할 필요가 있었으며, 더불어 그러한 중앙의 요구를 반영하고자 지역사회의 일부에서 애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수준에 그쳤다. 광주 지역사회의 분위기가 신라에 호의적이지만은 않았음을 암시한다. 아직 신라 중앙과 완전히 단절된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전반적으로 反新羅的인 기운이 만연한 가운데, 저들과의 관계를 되짚으며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려는 지역 토착세력의 은밀한 준동이 있었다. 眞聖女王 6년(892) 견훤이 자립하여 스스로 왕을 칭하기에 이르기까지 광주 지역사회의 분위기는 그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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