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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정주하 (경기대학교)
저널정보
한국서예학회 서예학연구 서예학연구 제37호
발행연도
2020.1
수록면
127 - 150 (2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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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해는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적 위기상황에 영의정이라는 최고 중책의 자리에서 선조의 어가가 파천(播遷)하게 되자 묘사(廟社)를 모시며 호위했던 인물로, 군국(軍國)의 방책을 여러 차례 개진한 충의(忠毅)를 가진 인물이다. 또한 선조 때 ‘문장팔가(文章八家)’의 한 사람으로 칭송받았으며, 8년 동안 ‘문형(文衡)’을 맡으며 당대 조선의 문풍(文風) 이끌었을 정도로 시문에 뛰어난 인물이었다. 때문에 이산해에 대한 연구는 대부분 그의 시와 문학 및 사상에 관한 것들에 편향되어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6세에 이미 ‘서소문자대필’이라고 언급될 정도로 글씨로 명성을 떨쳤으며, 24세에는 명종의 명에 의해 경복궁의 편액 글씨를 쓸 정도로 명필로서 인정받았다는 사실은 상대적으로 과소평가 되어 있는 실정이다. 이산해의 학문은 가풍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특히 어린 시절부터 집안의 어른들로부터 상당한 교육을 받았는데, 이 가운데서도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 바로 숙부 이지함이다. 때문에, 먼저 이지함에 대하여 알아 볼 필요가 있다. 이지함은 조선시대 대부분의 사대부들이 그러했듯이 기본적으로 성리학자이였지만, 스승인 서경덕의 학풍과 마찬가지로 의(義)와 이(利)를 함께 중시하는 모습을 보인다. 곧, 기존의 통설에만 집착하지 않고 상황에 맞는 유연하고도 실용적인 대처를 추구하는 개방적이고도 현실적인 사상을 견지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화담학파에게서 가장 두드러진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도가적이면서 실용을 중시한 화담학파의 사상은, 이산해에게 그대로 이어지게 된다. 이산해의 여러 묵적들 가운데서 초서 묵적들을 살펴보았는데, 이는 초서가 다른 서체들 보다 그의 개방적이고 실용적인 성향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초서풍에서도 이러한 경향이 그대로 반영되었는데, 유년기부터 영향을 받았던 장필의 광초풍과 더불어 축윤명, 황산곡, 그리고 황기로의 대자초서풍을 재해석하여 구애받지 않고 정감을 자유롭고 유려하게 풀어낸 초서 풍격을 구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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