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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수진 (국민대학교)
저널정보
대구사학회 대구사학 대구사학 제140권
발행연도
2020.1
수록면
27 - 63 (37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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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含資道?管柴將軍精舍草堂之銘」에는 당 황실의 외척인 柴哲威가 ‘龍朔’의 시기에 정사초당을 지었고 함자도행군총관에 제수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비편에 새겨진 단편적인 정보들과 문헌 사료를 치밀하게 조합하여 대백제전에 참전한 당의 행군총관이 백제가 아닌 신라의 영역으로 언제, 어떻게, 왜 이동한 것인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먼저 용삭 연간 또 한 명의 함자도행군총관이었던 劉德敏과 시철위의 재직 시기의 선후를 따져보았을 때 유덕민은 함자도총관으로 661년 8월 고종의 칙명을 전달하러 신라에 파견되었다가 김유신, 김인문 등 신라군과 함께 평양의 소정방 군대에게 군량을 전달하는 임무까지 수행하고 662년 2월 당으로 돌아갔다. 661년 8월 이전에는 당과 고구려의 전쟁이 벌어지기 전이었고 예상외로 백제부흥군이 거세게 저항하면서 당군과 신라군이 곤란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가림도총관 시철위를 함자도총관으로 변경하면서까지 고구려 방면으로의 작전을 대비할 현실적 이유가 없었다. 시철위는 유덕민의 후임으로 함자도총관에 제수된 것으로 보인다. 당은 소정방의 평양 회군 과정에서 신라로부터 군량을 보급 받고 앞으로의 대고구려전에서도 신라와의 공조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백제부흥군의 선전이 이어지자 고종은 웅진의 당군에게 신라로 들어가 사태를 관망하거나 여의치 않으면 당으로 돌아오라고 하였으나 662년 7월 유인원은 선택지에 없던 백제 잔류와 증병 요청의 표문을 올렸다. 자칫 고종의 뜻을 거역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에 시철위와 일부 병력은 신라로 보냈다는 내용도 함께 전달하여 ‘王言’을 무시한 것이 아님을 강조했을 것이다. 신라는 당 황실의 외척이라는 시철위의 신분적 특수성을 고려하여 일단 받아들인 후 웅진과 연결되는 교통로 상에 위치하면서 과거의 州治로 군대가 주둔할 수 있는 시설이 갖추어진 감문군에 체재하도록 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문무왕도 662년 7월 동생 김인문을 당에 사신으로 보내 책봉에 대한 사은과 평양으로의 군량 수송, 백제부흥군과의 전투에서 신라의 공적을 전달하고, 감문군에 체재하고 있는 시철위에 대한 지원까지 신라가 당에 협조한 내용들을 강조했을 것이다. 이에 고종은 김인문을 포상했고 시철위에게는 대고구려전을 대비한 새로운 임무를 부여하면서 함자도총관을 제수하고 이를 ‘新羅使’ 김인문에게 전달하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663년 4월경, 이 신라사가 시철위에게 함자도총관에 제수한다는 칙명을 전달하자 시철위는 충성을 다짐하며 이 비를 새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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