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질문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배영동 (안동대학교)
저널정보
비교민속학회 비교민속학 比較民俗學 第66輯
발행연도
2018.8
수록면
71 - 95 (25page)
DOI
10.38078/ACF.2018.08.66.71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질문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전라남도 농촌에 드물게 남아 있는 농군사명기(農軍司命旗)는 조선후기의 공동협업노동을 하던 농민조직이 군사문화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문화유산으로 이해된다. 여기서 농민조직은 두레인데, 농민들의 두레가 둔전병(屯田兵)이나 속오군(束伍軍)과 같은 군사조직의 문화적 영향을 받아서 기강과 규율을 갖춘 형태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군사문화가 농민들의 노동조직에 영향을 미친 것은, 조선의 병농일치제(兵農一致制) 아래서 농민이 병사이고 병사가 농민이었기 때문이다. 답작형 두레는 조선후기에 인구 증가 상황에서 동계와 촌계의 발달, 이앙법의 보급, 소빙기 자연재해와 대기근에 대한 대응 등과 더불어 등장하였다. 이러한 두레가 공동노동의 효율화를 위하여 군사조직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판단된다. 그 증거로는 농민을 농군(農軍)이라고 하는 점, 임진왜란 때 전라 좌우수영이 있던 전라남도 해안지역에 군고(軍鼓)라 불리는 풍물이 전승되고 있는 점, 농악의 악기편성이 조선후기 군영(軍營)의 악기편성과 닮았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백범 김구 선생이 19세기 말에 전라북도 김제군 만경평야에서 농군사명기를 목격한 바, 이는 19세기 말에 두레가 변질된 고지로 모내기를 할 때 사용된 것이었다. 또한 전라남도 장흥군 안양면 모령리의 농군사명기는 조선 후기 이래 농민조직이 군사문화의 영향을 받은 역사 · 사회 · 문화적 전통 속에서 형성되어 전승된 유산이라 하겠다. 20세기 후반까지 농군사명기가 비록 제한된 지역에서 남아 있었지만, 전라남도 이외의 답작지대에서도 더 발견될 가능성이 있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두레꾼이 사용한 농군사명기
Ⅲ. 병농일치제 전통과 농군사명기
Ⅳ. 맺음말
참고문헌

참고문헌 (0)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이 논문과 함께 이용한 논문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