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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정보
저널정보
중국사학회 중국사연구 중국사연구 제118호
발행연도
2019.1
수록면
27 - 59 (33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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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송의 원우당적비와 남송의 경원당적비에 대해 검토하였다. 이 두 비석은 세워졌던 시기는 다르지만 형식이나 비석을 세운 목적도 같다. 전자의 경우 겉으로는 구법당 인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만, 실은 채경이 자신의 정적들을 배제한 결과물이었다. 후자의 경우도 그러했는데, 한탁주가 자신의 정적인 조여우를 내치는 과정에서 리학계 인사들을 전면에 내세운 것이었다. 남송대 권신 정치는 사실상 북송 휘종대 蔡京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는 諫官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장기 집권하였고, 남송대 권신들도 그러했다. 그런데 채경이 국정을 잘못 이끌어 그 결과 북송이 멸망하였다. 이런 역사적 경험과 더불어, 公論을 중시하는 理學의 보급으로 인해, 남송대에는 독서인들도 국정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졌다. 그들은 權臣이 국정을 독단할 때마다 저항하기에 이르렀다. 그뿐만 아니라 그 권신을 임명한 황제에 대해서도 주의를 촉구하고 있었다. 이런 까닭으로 전자와 달리 후자에는 태학생을 비롯한 독서인들의 명단이 하나 더 들어가 있었던 것이라 판단된다. 또 우리나라도 조선시대에 이르러 성리학이 발전하면서 성균관 유생들이나 지방 선비들의 정치 참여가 활발하였다. 따지고 보면 그 원류는 남송대에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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