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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불교미술사학회 강좌 미술사 강좌 미술사 제43호
발행연도
2014.1
수록면
99 - 132 (3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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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초 해남 대흥사의 千佛殿과 千佛像 조성은 단순히 전각과 불상의 조성이라는 의미를 넘어서 있다. 조선후기 禪과 講學의 宗院을 표방하던 대흥사의 이념이 그 조성 과정 속에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천불상 조성을 둘러싼 우여곡절과 최근에 발견된 『千佛造成錄』은 19세기 대흥사의 위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18세기 후반 대흥사는 淸虛休靜의 영정을 모신 表忠院을 국가로부터 公認받아 임금을 대신하여 파견된 使臣의 享祀를 받았다. 청허휴정은 임진왜란 당시 불교계의 어른으로서 義僧軍 모집에 앞장서 국란 극복에 가장 큰 공로가 있었고, 그의 法脈을 계승한 淸虛系가 불교계의 주류였기 때문에 표충원이 공인되면서 대흥사는 청허계의 首寺刹일 뿐만 아니라 전국의 종원으로서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1811년에 화재가 나서 많은 전각들이 燒失되자 새롭게 重建하여 대내외에 대흥사의 위상을 알리고자 하였다. 그 과정에서 천불전과 천불상이 조성되었다. 먼저 천불전을 완성한 후 천불상을 경주에서 조성하여 海路를 통해 운반하였는데 768位를 실은 큰 배가 태풍에 표류하여 일본에 표착하였다. 다행히 모두 무사히 8개월 만에 대흥사에 돌아와 불상을 안치하였다. 천불상을 조성할 때 전국의 信徒로부터 시주금을 받으면서 명단을 모두 기록해 놓았는데, 근래에 그 자료가 발견되었다. 1006佛의 名號 아래에 전국 54개 사찰의 승려 680명, 재가자 676명의 시주자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42명의 비구니 法名도 포함되어 있다. 전각과 불상을 조성하는데 1천 명이 넘는 시주자가 전국에서 참여하였다는 점에서 당시 대흥사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고 또 불교계의 佛事 형태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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