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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불교미술사학회 강좌 미술사 강좌 미술사 제42호
발행연도
2014.1
수록면
11 - 31 (2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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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창덕궁은 태종 5년(1405) 이래 600여 년 동안 끊임없이 변화를 겪으며 오늘에 이르렀기에 역사의 여러 층위를 담고 있다. 조선전기의 창덕궁은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방화로 소실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기 때문에 건물과 시설이 전혀 남아있지 않아서 그 모습을 알 수 없다. 광해군 1년(1608년)에 재건된 창덕궁은 260년간 조선후기 왕조의 정궁 역할을 하면서 이궁인 경희궁과 함께 조선후기 왕조사의 중심 무대로 발전하였다. 1833년의 대화재로 내전 일곽이 전소되기는 하였지만 곧이은 복구공사로 대부분 회복되었다. 1867년에 경복궁 중건이 완료되고 高宗이 경복궁으로 이어하면서, 정궁으로서의 역할은 없어졌지만, 1896년 아관파천으로 경운궁이 새로운 왕궁으로 활용되기 전까지는 경복궁과 더불어 이궁으로서 양궐체재의 한 축을 이루며 운영되었다.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혁명 등 국내적 혼란과 청일전쟁으로 대표되는 대외적 혼란 사이에서 왕궁의 정상적인 운영은 점점 어려워져 갔다. 이런 와중에 연경당이 새롭게 지어지고 함녕전으로 개칭된 수정전의 일곽에 동, 남, 북 세 별당이 세워지는 등 새로운 모색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와 더불어 창덕궁의 중희당과 집옥재를 경복궁으로 이건해야 하는 일도 벌어졌다. 그렇지만 1903년의 수리계획 문서를 보면 그때까지 창덕궁은 대체로 제 모습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907년에 순종이 즉위하고 나서 순종의 이어처로 결정되면서, 창덕궁은 일제 통감부의 치밀한 계획 아래 일본인의 손으로 철거, 훼손, 개조되었으며, 궁역 가운데 창경궁과 후원은 모두 일반에게 개방되는 동물원․식물원․박물원과 공원으로 전락하였다. 나라를 잏은 황제는 나인 6명의 보살핌을 받는 나약한 존재로 전락하였으며, 그가 독차지할 수 있는 영역 또한 창덕궁내의 지극히 좁은 영역으로 한정되었다. 인정전 영역은 알현소로 개조되어 정치적 역할을 완전히 잃은 사적 공간으로 변질되었으며, 인정전 둘레의 행각은 왕실의 행사장으로 사용하기 좋도록 완전히 다시 지어졌다. 인정전과 편전인 선정전 사이의 연결은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으며, 오로지 침전과의 연결을 위하여 일본식 편복도가 첨설되었다. 정치를 보좌하던 궐내각사는 모두 헐리고 그 대신에 궁내부청사가 세워져 순종 황실의 사무를 처리하였다. 1907년부터 1910년 사이에 벌어진 끔찍한 변화의 모습은 아직도 치유되지 않은 채로 창덕궁 곳곳에 남아 있다. 이러한 흔적을 지우지 않고는 창덕궁의 온전한 회복을 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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