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동방한문학회 동방한문학 동방한문학 제53호
발행연도
2012.1
수록면
31 - 54 (24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국토 중심부에 있는 속리산은 삼국시대 때는 전란의 중심지였다. 이곳에 주변에 남아 있는 성곽과 한강, 금강, 낙동강으로 흐르는 물줄기를 통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있는 역사 사실을 照驗할 수 있다. 특히 백제가 한강 유역에서 남하하여 금강 유역인 공주에 수도를 정하고, 이어 얼마 있다가 다시 부여에 수도를 정할 때는 신라와 백제의 각축전이 심한 시기였다. 바로 이 시기가 속리산이 전략적으로 중요했던 시기였다. 고려 때에도 문인들이 남긴 시를 보면 이곳에서 외구를 방어하기도 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하지만 통일이 된 조선 시대에 오면 이때부터 이곳에 평화의 시기가 온다. 조선 시대문인들에게 명산을 유람한다는 것은 일생에 한번 하기 힘들었다고 한다. 이 당시 문인들이 속리산을 세속과 떨어진 깨끗한 지역으로 무릉도원 연관을 지어 설명하기도 한다. 때문에 속리산을 중국에 있는 箕穎과 같은 산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특히 조선 시대 문인들이 남긴 시를 통하여 보은에 오는 노정을 짐작할 수 있다. 서거정의 시를 보면 공주에서 배를 타고 청산에 와 다시 작은 배를 타고 보은에 온다. 그리고 우암은 화양동에서 출발하여 공림사를 거쳐 장갑으로 온 적도 있다. 자동차 위주로 도로가 만들어진 지금 널리 사용하는 길이 아니다. 속리산에서 유명한 곳으로 법주사와 문장대를 먼저 말할 수 있다. 법주사는 신라에 불교가 전파될 무렵 義信이라는 승려가 인도에 가 불경을 가지고 와서, 흰 나귀에 싣고 바로 이곳 속리산 법주사에 들어와 불경을 연구하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이곳을 법주사라고 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 법주사에 온 문인들을 으레 신라시대를 떠 올리는 시 구절을 남기면서, 신라 목탑형식을 가진 팔상전을 묘사하거나 쓰러진 담을 보고는 無常함을 노래하기도 한다. 그리고 속리산을 찾은 문인들의 개인 감회가 가장 다양하고 집중되어 보인 곳은 문장대이다. 이곳에 올라 三韓 시대를 생각하기도 하고, 문인 成運 大谷의 발자취를 그리워하기도 하고, 문장대를 부처님 설법장소로 보고 내려다 보이는 산봉우리를 연꽃에 비유하기도 한다. 이곳을 살다간 문인들이 많이 있다. 成運 大谷, 冲庵 金淨, 魚允中, 壺山 朴文鎬 같은 분이 있다. 또 이곳에는 桓齋 朴珪壽의 묘소도 이곳에 있다. 이곳에 살면서 속리산을 자주 탐방한 문인들의 작품 세계의 전모를 살피지 못했다. 이는 차후의 과제로 남기고자 한다. 특히 속리산이 보은과 상주에 걸쳐 있는 산으로 상주의 주요 인물들에게도 많은 작품이 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주변지역을 연관지어 고찰하면 속리산이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 올 것이다.

목차

등록된 정보가 없습니다.

참고문헌 (0)

참고문헌 신청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