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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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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동방한문학회 동방한문학 동방한문학 제51호
발행연도
2012.1
수록면
7 - 38 (3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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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7세기 비지문 창작의 양상으로 南冥神道碑文을 대상으로 연구하였다. 남명신도비문은 모두 4명에 의해 찬술되었고 현재 4종이 전해져 오고 있다. 神道碑文 이외에 墓表나 墓碣文, 墓碑文 등 한 인물에 대해 저작되는 다양한 형식의 비지문은 이전부터 있어왔고 한 편 이상의 묘표나 묘갈문, 묘비문도 간혹 존재하지만 한 인물에 대해 4명이 각각 신도비문을 지은 경우는 남명신도비문이 독보적이다. 비지문의 속성상 대상자의 의지와 상관없이 후대 자손과 문인들의 이해관계에 의해 저작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나 남명신도비문은 하나의 문체로 한 사람을 대상으로 네 사람의 입장에서 기술하고 조망했다는데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4종의 남명신도비문은 찬술자의 문학관에 따라 미묘한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내암의 경우, 여타 작품보다 가장 이른 시기에 찬술되어 비문의 외형적 면모 보다는 남명학의 정체성 확립을 위한 내실 있는 서술에 주력을 했다. 그러므로 남명학파의 적전제자로서 소임에 주력했고 외형에 집착하기 보다는 자신의 학문관인 道德과 實을 바탕으로 저술하였다. 용주의 경우, 三長(才·識·學)·五難(煩而不整, 俗而不典, 書不實錄, 賞罰不中, 文不勝質)의 독특한 史觀을 바탕으로 저술하였다. 그는 신도비문의 중심 내용을 고사의 인용을 통해 비문의 내용과 외형적 문체를 적절히 조화를 이루고자 하는 시도하였다. 미수의 경우, 사실 그대로 기록하려는 노력으로 기술의 嚴正을 통해 철저한 사실 위주의 기록을 추구하였다. 미수는 古文의 法度를 받아 사실 기록의 輕重을 따지지 않고 한 글자 한 구절도 산만한 것이 없이 簡古하게 쓰며 記事의 法度는 큰일은 상세히 적고 작은 것은 생략하며 꽃다운 것은 취하지만 중요한 것은 더욱 부각 시킨다는 記事 원칙에 입각하여 서술하였다. 비록 후손이나 문인들의 청탁으로 이루어진 것이지만 자신의 엄정하고 올곧은 기술은 어떠한 타협도 있을 수가 없었고 비문의 찬술자 보다는 史官의 입장에서 기술하였다. 우암의 경우, 내암·용주·미수 보다 남명과 대립적 관계에 있었지만 정파적, 학문적 대립에서 탈피하여 서술하였다. 특히 인물의 업적보다는 인물의 성품에 따라 포폄을 달리 하고자 하는 태도인 序其爲人의 문학관은 남명을 당파적 영수에서 시대의 師表로 승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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