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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군사연구소 군사연구 군사연구 제131호
발행연도
2011.1
수록면
7 - 54 (4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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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러일전쟁을 계기로 다시 일어난 의병들의 투쟁은 1907년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을 계기로 절정에 달해, 그 여파는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가장 멀리 떨어진 경상남도 지역에까지 이르렀다. 이 글은 1907년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 이후 경남지역에서 일어난 의병운동의 실상과 이에 대한 일본군의 탄압 과정을 종합적 으로 재구성하는 데 목적이 있다. 이러한 작업은 최근 발굴된 보병제14연대 진중일지 때문에 가능하게 되었다. 이 자료는 일본육군 보병제14연대가 기록한 일종의 전투보고서 형태의 일지로 1907년 7월 한반도 주둔 이후 1909년 6월 본국 귀환까지 영남과 호남지역의 ‘의병토벌’에 관한 사실들을 기록한 것으로 본 연구는 이 자료의 분석 결과를 토대로 작성한 것이다.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1907년 8월 대한제국 군대의 강제해산 직후만 해도 경남지역 의병들의 활동은 덕유산과 지리산에 인접한 일부 지역에 국한되었을 뿐, 실제 의병운동이 좀 더 광범위한 지역으로 확산되기 시작한 것은 1908년 1월에 이르러서였다. 이후 경남지역에서는 서부경남 일원을 중심으로 약 1년 반 동안 의병과 일본군 사이에 수많은 접전이 이루어졌고, 이 과정에서 많은 의병들이 일본군에 의해 무참히 학살되었다. 한반도 남부의 다른 지역과 비교하여 특별히 치열했다고는 할 수 없다. 오히려 전체적으로는 경남지역 의병운동은 다른 지역에 비해서 늦게 본격화되었으며, 저항 강도도 상대적으로 약했다. 경남지역 의병운동이 이러한 특성을 지니게 된 원인으로는 첫째, 개항장인 부산과 군항인 진해 등에 일찍부터 일본군이 주둔하여 의병세력의 동태에 대한 감시가 용이했다는 점, 둘째 척사파 유생층의 기반이 상대적으로 약해 의병운동을 촉발시키는 내부적 기제가 미약했다는 점, 셋째, 따라서 외부지역 의병세력의 영향이 컸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비록 전체적으로 경남지역 의병세력의 저항이 타 지역에 비해서 약했다고는 하지만, 경남 서부지역과 동부지역에서만큼은 호남지역이나 경북지역 못지않게 의병투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이러한 경상남도 내 의병운동의 지역적 편중은 1908년 1월 13도연합의군의 서울 진공 실패 이후 의병세력의 남하, 덕유산과 지리산 인근 호남지역 의병운동의 발전, 일본군의 ‘토벌’ 공세로 인한 경북 의병세력의 남진 등이 원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군 보병제14연대가 경남지역 의병세력에 대한 본격적인 ‘토벌’ 공세에 나선 것도 경남 서부지역 의병운동의 고조 시기와 거의 때를 같이 한다. 1907년 군대해산 직전 부산에 상륙한 이후 보병제14연대는 동년 9월 이후 대구에 연대본부를 설치하고 영호남지역의 의병세력을 초토화하기 위한 군사작전을 전개하였다. 일본군은 1908년 2월부터 보병제14연대 관할 내 수비지를 3개의 수비구(대구수비구,광주수비구, 경주수비구)로 나누어 영호남지역 의병세력에 대한 압박을 강화해 나갔다. 특히 지리산 인근 의병세력의 진압에 심혈을 기울이던 동 연대는 동년 4월에 이르러 종전의 광주수비구를 진주수비구로 바꾸고 제2대대본부를 진주로 옮겨 경남 서부지역의 의병세력에 대한 본격적인 ‘토벌’ 행동에 돌입하였다. 대구-진주-경주수비구 체제하에서 동년 11월까지 지속적으로 수행된 일본군의 토벌작전 결과 경남 서부지역에서 의병활동은 현저히 약화되어 사실상 의병세력이 거의 자취를 감출 지경에 이르렀다. 이른바 ‘토벌’ 기간중 보병제14연대가 의병세력에게 입힌 피해는 드러난 통계만으로 볼 때 의병 사망자 855명, 피검자는 145명이었다. 군대 해산 이후 의병세력 진압 임무를 띠고 한반도에 상륙한 일본군 보병제14연대에 의한 경남의병의 진압은 전술적 측면에서 보면 호남지역 의병세력을 진압하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의 성격을 띠었다. 이 사실은 1908년 11월 일제가 진주 수비구를 폐지하고 광주수비구를 복구시킨데 이어 1909년 2월에는 호남지역 의병‘토벌’을 위해서 남원수비구를 신설하여 경주-광주-남원수비구로 수비구체제를 재편한 사실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호남지역 의병세력의 완전 진압 임무는 1909년 6월 보병제14연대가 본국으로 귀환함으로써 후속 부대인 한국임시파견대에게 맡겨지게 되었다. 그리고 한국임시파견대에 의해 수행된 호남지역 의병 학살의 결정판이 1909년 9월과 동년 10월에 실시된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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