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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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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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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영남퇴계학연구원 퇴계학논집 퇴계학논집 제8호
발행연도
2011.1
수록면
139 - 167 (29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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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서 김인후가 살았던 16세기는 조선초기 사화의 여파가 채 가시기 전이어서 도학정치를 펼 수 있는 상황이 되지 못하였다. 그는 개인적으로 인종이 세자로 있을 때 교육을 맡아 인연을 맺었으나 인종이 급서하는 바람에 심적 고통을 겪고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그후의 정치적 상황도 여전히 척족정치로 인하여 당쟁이 이어져 도학정치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고 낙향하였다. 그는 타고난 자질이 문학에 뛰어나 많은 시문을 남겼으나, 성리학에 관한 것은 거의 없고, 단편적인 것 뿐이다. 그러나 당시 호남지역에서 고봉 기대승, 일재 이항 등과 학문적 교류를 하면서 영향을 끼친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수학 초기부터 『소학』을 중요시하여 조선초기 도학 개창기의 정암 조광조 등 여러 선비들의 『소학』에 의한 일상수양의 중시 학풍을 계승하였다. 그 외 주자학이나 성리학에 대한 일반 유학자로서의 관심을 살필 수 있는 자료가 약간 있다. 대표적인 것이 일재 이항과의 태극·음양에 대해 논의한 것과 「천명도」의 작성이다. 「천명도」는 성리학의 천인합일을 나타내는 도로서 매우 중요한 것인데, 처음 도를 작성한 추만 정지운과 이를 수정한 퇴계 이황의 그것과 다른 특색을 가지고 있다. 그는 기묘명현의 도학정치를 계승하여 당대에 요순정치를 실현하려는 큰 포부를 가졌으나 시대적 불운을 만나 정치적으로는 좌절된 선비였으나, 일반 유학자로서 또 자연시인으로서 당시 호남지방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던 선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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