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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외국어대학교 동유럽발칸연구소 동유럽발칸연구 동유럽발칸연구 제33권
발행연도
2013.1
수록면
369 - 396 (2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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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6년부터 합스부르크 가문은 보헤미아 왕국을 통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통치과정에서 부각된 중앙집권화 정책과 비가톨릭세력에 대한 압박정책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위정자들과 보헤미아 귀족들 사이의 대립을 유발시켰다. 특히 비가톨릭세력에 대한 탄압정책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1617년부터 이러한 상황은 보다 심화되었고 그것은 결국 ‘제 2차 프라하 창밖 투척사건’을 유발시켰다. 프라하 창밖 투척사건이후 보헤미아 귀족들은 ‘30인 집행위원회’를 구성한 후 헌법 제정 및 군대 소유도 선언했다. 아울러 이 위원회는 1619년 8월 22일 페르디난트 2세가 승계한 보헤미아 왕국의 국왕지위를 더 이상 인정하지 않겠다는 입장도 밝혔는데 그러한 자세는 ‘오스트리아의 위정자가 보헤미아 귀족들의 제 권한을 침해하지 않는다’ 라는 1526년의 합의각서에서 비롯된 것 같다. 이후 ‘30인 집행위원회’는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와 접촉한 후 그를 8월 26일 보헤미아 왕국의 국왕으로 선출했다. 프리드리히 5세는 보헤미아 왕국에서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 하기 위해 1620년 11월 8일 빌라 호라에서 페르디난트의 오스트리아군과 대접전을 펼쳤으나 끝내 패하고 말았다. 이후 보헤미아 왕국의 전 지역에서는 재산몰수, 추방, 그리고 재가톨릭화가 2년 이상 지속되었고 그러한 상황은 특히 프라하의 사회 구조를 근본적으로 변경시키는 요인으로도 작용했다. 실제적으로 페르디난트 2세는 몰수한 신교 귀족들의 영지를 자신의 추종 세력과 보좌관들에게 하사했고 후스전쟁이후 영토적 손실을 입었던 프라하 인근의 수도원들과 고위성직자들에게도 분배했다. 그리고 1627년 5월 10일에 발표된 보헤미아 개정지방법이 보헤미아 왕국에서 본격적으로 시행됨에 따라 지금까지 이 왕국에서 절대적 권한을 행사했던 귀족들의 위상은 크게 실추되었고 이것은 보헤미아 왕국에서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군주의 등장도 가능하게 했다. 이에 따라 보헤미아 왕국의 위상은 오스트리아의 한 지방으로 격하되었고 그러한 지위는 1918년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이 등장할 때 까지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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