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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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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동양학 동양학 제54호
발행연도
2013.1
수록면
151 - 166 (1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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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 양국은 역사상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특히 元·明·清 三代에 걸쳐 이러한 관계는 더욱 긴밀해졌다. 세 시대의 수도가 모두 北京이었으므로 한인들에게 북경은 더 이상 낯선 도시가 아니었다. 근대에 접어들어 일제의 침략이 심해짐에 따라 많은 한인들은 중국에 이주하였는데 그 중에는 북경에 이주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특히 일제가 한국의 국권을 침탈한 후에 많은 한국 애국지사들은 독립운동의 목적을 품고 북경에 이주하였다. 북경은 특수한 지리적 조건으로 인해 각지 중국 관내지역의 한인독립운동세력과 동북의 한인독립운동세력, 그리고 국내의 반일세력과 연락을 담당하는 중요한 지역이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북경은 上海에 이어 독립운동이 가장 활발한 중국 관내지역 도시 중 한 곳이 되었다. 그러나 북경의 한인독립운동세력은 사상, 이념의 대립과 독립운동노선의 차이로 인해 민족주의자, 공산주의자, 무정부주의자로 나뉘어져 각파의 역량이 상황에 따라 계속적으로 변화하였다. 이러한 한인독립운동세력 중에서도 민족주의세력이 임시정부와 가장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들 민족주의자 안에도 반임시정부 성향의 인물들이 있었으나 이는 독립운동노선에 대한 이견과 임시정부의 조직형태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들은 미국에 위임통치를 제안한 이승만과 그의 추종자들을 중점적으로 비난하였고, 이는 비타협적 독립운동노선의 표출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이 주도하는 일련의 활동들이 좌절을 맞으면서 민족주의자들의 사상에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였고, 반임시정부의 경향도 소실되었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시종일관 북경의 한인독립운동세력을 효과적으로 지도하지 못하였고, 중국 관내지역 한인독립운동세력의 통합 역시 중국의 전면적 항일전쟁 개시 후에야 실현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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