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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동양학 동양학 제50호
발행연도
2011.1
수록면
141 - 162 (2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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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20세기 전반부에 서울을 중심으로 영업을 한 조선요리옥에 대해 그 역사를 밝히는 데 목적을 두고 마련되었다. 종래 최초의 조선요리옥인 명월관은 1909년에 설립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당시의 신문·잡지 자료 등을 조사한 결과, 명월관은 1903년 9월 17일에 문을 연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조선통감부 시기에 이미 조성되어 있던 서울의 일본요리옥을 모방하여 조선요리옥 명월관이 설립되었음도 확인하였다. 아울러 설립자 안순환은 대한제국의 왕실음식을 담당했던 요리사 출신이 아니었음도 밝혔다. 본래 안순환은 전통적인 한문 교육과 함께 근대교육 기관에서 수학한 인물이다. 골동품 판매상도 하였던사업가이기도 했다. 그러한 그의 능력으로 인해서 대한제국 궁내부에서 일을 하였다. 명월관의 업주라는 경험으로 인해서 1909년 1월 21일부터 1910년 8월 29일 사이에 대한제국의 왕실음식 부분 책임자가되었다. 동시에 본 연구는 식민지시기 조선요리옥이 지닌 문화적 성격에 대해서도 밝혔다. 식민지시기 조선요리옥은 단순한 음식점이 아니었다. 음식점이면서 각종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모임이 열렸던 곳이었다. 여기에 근대적으로 바뀐 기생들이 드나들면서 접대를 하기도 했다. 조선요리옥은 천 가지의 얼굴을 가진연회의 장소였다. 사실 조선시대에는 왕실이나 관청에서 행하는 공식적인 연회를 제외하면, 사적공간에서 대부분의 연회가 이루어졌다. 이에 비해서 식민지시기 조선요리옥은 사적공간에서 행해지던 연회를공적영역으로 옮겨놓았다. 이 공적영역에서는 공적인 모임뿐만 아니라, 사적인 식욕과 성욕까지도 공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따라서 ‘근대’라는 시각에서 보면, 식민지시기 서울의 조선요리옥에서 소비되었던 조선음식과 그 연회는 사적이면서도 동시에 공공적이라는 성격을 확보한 것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일정한 서비스료를 지급하고, 공개적으로 자신들의 사적 모임을 조선요리옥에서 펼칠 수 있었다. 그러면서 조선음식이 지닌 사적인 이미지도 공적영역으로 옮겨갔다. 이와 같이 근대적인 조선요리옥의 등장은 ‘조선음식’이라는 표준화된 이미지를 공적으로 소비하도록 만들기도 했다. 이로부터 사람들은 자신의 집에서 소비하던 음식과다른 차원의 조선요리옥 음식을 조선음식의 대표로 여기게 되었다. 이것이 식민지시기 조선요리옥에서판매했던 조선음식이 지금까지도 ‘한정식’이란 이름으로 그 대표성을 유지되고 있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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