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서예학회 서예학연구 서예학연구 제32호
발행연도
2018.1
수록면
81 - 104 (24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본고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서론(書論) 가운데 학서방법론(學書方法論)을 고찰하였다. 추사의 학서의 방법은 ‘유당입진(由唐入晉)’과, ‘선북후남(先北後南)’, 및 ‘상진폄모(尙眞貶摹)’의 측면으로 분류된다. 첫째, 추사는 진(晉)나라 글씨는 배우기 어려워서 당(唐)나라 글씨의 법도를 능숙하게 익힌 후에야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정서(正書)의 학습교재로 구양순(歐陽詢)의「화도사비(化度寺碑)」ㆍ「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과 우세남(虞世南)의「공자묘당비(孔子廟堂碑)」가 가장 적합하다고 언급했다. 또한 당나라를 경유하여 진나라로 들어가는 것이 학서(學書)의 지름길이자 정도(正道)라고 보았다. 그의 학서방법에서 핵심은 주로 당나라의 구양순, 저수량(褚遂良), 우세남 글씨를 범본으로 삼는 것이었으며, 입문과정은 당나라를 거쳐 진나라로 들어가야 한다는 ‘유당입진론’으로 귀결시킬 수 있다. 둘째, 추사는 서법이 변천함에 따라 유파(流派)도 남북으로 섞여서 그 근원을 소급하지 않으면 옛 것을 알지 못한다고 피력하였다. 그는 한(漢) ․ 위(魏) 이하 금석의 문자가 수천 종이 되어 종요(鍾繇)와 삭정(索靖) 이상을 소급하려면, 반드시 북비(北碑)를 많이 보아야 그 원류를 인지할 수 있다고 보았다. 서가는 반드시 왕희지(王羲之)와 헌지(獻之) 부자를 준칙으로 삼지만, 이왕(二王)의 글씨는 세상에 전본(傳本)이 거의 없으며, 진적으로 보존된 것은 왕희지의「쾌설시청첩(快雪時晴帖)」과 헌지의「송리첩(送梨帖)」 뿐이어서 모두 계산해도 100자를 넘지 않는다고 하였다. 육조(六朝)의 비판(碑版)은 자못 전본이 있어 구양순과 저수량 모두 여기에서 나왔기 때문에 북비를 많이 보아야 글씨의 본령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선북론(先北論)’에 방점을 찍은 내용이라 하겠다. 셋째, 추사는「구성궁예천명」의 원석(原石)과 탑본(搨本)이 그대로 남아 있으므로 이것이 아니면 종요와 삭정의 옛 법을 거슬러 올라갈 수 없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황정경(黃庭經)」은 진나라의 글씨가 아니고, 「악의론(樂毅論)」은 이미 그 당시에 선본(善本)이 없어져서 표준으로 삼을 수 없으며, 「유교경(遺敎經)」은 당나라 경생(經生)의 글씨라서 부득이 진적(眞跡)에 비해 한 등급이 낮고 후세 석각(石刻)의 수차례 번모(飜摸)한 것에 비할 바가 아니라고 인식했다. 학서의 요체는 잠심(潛心)하면서 힘써 인내하고, 이러한 관문을 넘어서야만 명쾌한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라고 피력했다. 그러므로 추사의 학서 요결은 진본중시(眞本重視)와 모본폄하(摹本貶下)의 ‘상진폄모론’으로 정의할 수 있겠다. 본고는 추사의 학서방법론을 바탕으로 오늘날 서가들이 임서와 창작에 적용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목차

등록된 정보가 없습니다.

참고문헌 (0)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