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사학사학회 韓國史學史學報 韓國史學史學報 제30호
발행연도
2014.1
수록면
45 - 79 (35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전성과 참성의 초례는 산 정상의 野壇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시기적으로 전성의 제천단은 고려 전・중기, 참성의 제천단은 고려 후기에 국가제사에 편재되어 운영되었다는 점에서 다르다. 선종 5년(1088) 鹽州의 동쪽에 있던 氈城 제천단에서의 초례는 성종 1년(982) 최승로의 건의로 중단된 조치에 대한 修復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고종 19년(1232) 강도로 천도할 때까지 이후 지속되었다. 『대동지지』에서 현종 20년(1029) 국왕이 염주에 행차하였다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는데, 전성 제천단에서 친초의 가능성을 염두에 둘 수 있다. 전성의 제천단은 연안의 天拜山으로 비정된다. 『대동지지』에서는 연안의 옛날 제천단을 南神堂이라고 부르고 있었음을 전하고 있다. 『연안부지』에서는 제천단의 모습이 원형이고, 흙으로 쌓았음을 전하고, 이곳에 오르면 사방이 트여있다고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위치를 마리산 참성단과 비교할 수 있다. 마리산 참성단이 석축인 것에 비해 전성의 제천단은 토축하였다는 점이 다르다. 또 『연안부지』에서는 천배산에 大王堂과 남신당의 사당이 존재했음도 전한다. 대왕당은 전성의 제천단 자체를 지칭하는 것으로, 남신당은 제천의 의례를 준비하고 향사・헌관 등이 재숙하던 공간으로 추측된다. 이런 점에서 대왕당은 마리산 참성단과, 남신당은 齋宮과 비교될 수 있다. 하지만 그 기능은 점차 상실되어 남신당은 이후 불교의 암자로서 존재하여 南神堂菴으로 불리다가 이후 폐치된 것으로 보인다. 역시 마리산 참성단의 재궁이 天齋宮・天齋菴으로 불렸던 것과 비교할 수 있다. 선종 5년(1088) 3월의 초례에 정2품과 정3품의 관리가 파견되고 있음은 고려 후기 마리산참성에서의 향사가 3품직이었던 대언이었던 것과 비교된다. 또 마리산참성의 예와 비교할 때, 摩尼山塹城祭田과 같이 제수 마련을 위한 별도의 氈城祭田도 운영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전성과 참성의 제천단을 비교할 때, 주목되는 것은 역사인식과 관련된 문제이다. 전성에 대해서는 ‘제천단’이라는 성격만 밝히고 있는데 비해 참성단의 경우는 ‘단군제천단’이라 하여 성격은 물론 역사성까지 이해의 폭이 심화되고 있다. 이런 두 자료에서의 차이는 고려시대의 역사계승인식과 관련을 가지는 것으로 파악된다. 특히 마리산참성에서 국왕의 친초 배경이 “삼한을 진단으로 변화시키려는데三韓變爲震旦” 있었다. 이것은 삼한에 머물러 있던 고려의 역사인식이 고조선[또는 전조선]으로의 변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불과 20여년 후 국조를 단군으로 설정하여 이후 국가들을 일정한 체계 속에서 정리한 『삼국유사』와 『제왕운기』가 편찬되었다는 사실은 상당한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목차

등록된 정보가 없습니다.

참고문헌 (36)

참고문헌 신청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