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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한국사학사학회 韓國史學史學報 韓國史學史學報 제25호
발행연도
2012.1
수록면
5 - 27 (23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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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역사학 전통은 옛 기록을 정리하고 그 이후의 새로운 사실을 추가하여 서술하는 방식을 선호하고 있었으며, 개인의 업적을 서술하기에 앞서 국가의 시조(始祖) 혹은 가계(家系)의 선조(先祖)들의 위대한 업적에 대한 기술(記述)에 힘을 기울이는 성향이 강했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에서 특정한 인물 개인의 전기 곧 위인전(偉人傳)이 편찬된 게 전한다고 하더라도 후대에 계승하여 이를 재조명하여 거듭 편찬해내는 경향이 강했고, 유교적인 사관에 입각하여 춘추필법(春秋筆法)에 따라 역사를 편찬하는 전통이 있었으며, 이에 따라서 도교(道敎) 등에 대해 비판하는 관점에서 서술하고 또한 이를 계승하는 역사의식 역시 분명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 역사학의 영향을 받아 『사기(史記)』등을 본받은 기전체(紀傳體) 사서(史書)도 있었으며, 한편으로는 『진춘추(晉春秋)』와 같은 편년체(編年體) 사서도 수용되어 실제로 이를 바탕으로 한 역사 편찬이 이루어졌고, 그에 따라 기전체 체재를 따랐다고 하더라도 열전(列傳) 못지않게 본기(本紀) 역시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하겠다. 이러한 전통을 계승한 신라 이주 고구려인들이 편찬하였다고 믿어지는 역사서 『고려고기(高麗古記)』의 내용상 특징은 4가지 점이었다고 생각한다. 첫째로, 고구려의 수(隋)・당(唐)에 대한 항쟁을 크게 내세우고 있었으며, 둘째로는 연개소문(淵蓋蘇文)의 경우에도 그래서 고평양성(古平壤城) 및 장성(長城)의 축조(築造) 사실을 업적으로 전면에 내세우고 있었다. 셋째로는 보덕(普德)을 비롯한 안승(安勝) 등 고구려인들의 신라 이주에 따라 결과적으로는 신라의 삼국 통일에 기여한 사실을 부각하여 특기하고 있었다. 넷째로는 보덕의 이주 이후의 그 제자들인 승려 및 여러 인물들의 활동들도 부각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신라 이주 고구려인들의 역사편찬 가운데 『보덕전(普德傳)』자체는 보덕과 더불어 신라 이주뿐만 아니라 고구려 멸망까지 함께 겪었던 개심(開心)과 보명(普明) 등 보덕의 제자에 의해 편찬되었을 것이며, 그리고 보덕의 제자들인 개심과 보명의 전기인 『개심전』과 『보명전』역시 그들의 다음 세대인 직계 후손 및 제자들에 의해 편찬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보덕전』과 『개심전』・『보명전』 그리고 『개소문전』 등이 담긴 『고려고기』는, 보덕을 기준으로 살핀다면, 적어도 그보다 3세대쯤 후인 곧 약 100년 정도 이후의 신라 이주 고구려인의 후예들이 편찬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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