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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사학사학회 韓國史學史學報 韓國史學史學報 제29호
발행연도
2014.1
수록면
141 - 177 (37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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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 성리학의 수용과 더불어 유통된 『통감강목』은 조선 초기부터 왕의 경연에서 『대학연의』와 함께 교재로 선정될 만큼 주목되었다. 조선 초기 전대사 정리 작업으로 태조대에는 『고려국사』가 태종대에는 신라를 정통으로 하는 강목체 『동국사략』이 권근에 의해 편찬되었다. 정도전 정총이 편찬한 『고려국사』는 태종 때 재편찬에 착수하였다가 완성하지 못하였다. 세종 때 이를 수정 보완하는 과정에서 直書 改書 문제가 대두되어 논란이 있었는데, 이 때 세종은 『춘추』와 『좌전』 그리고 『통감강목』의 서술 구조를 근거로 그때 사실 그대로 후대에 전하여야 한다는 직서주의로 방침을 정하였다. 또한 천문관측 기사 등 災異기사를 전부 기록할 것인가 대해서는 『한서』·『후한서』의 재이기록을 『통감강목』에 전부 기록하지 않은 사실을 근거로 기존에 기록한 사실만을 그대로 두기로 하는 등 『고려사』 편찬에 『통감강목』이 주요한 기준이 되었다. 『고려국사』에는 우왕 창왕을 辛禑·辛昌으로 서술하였는데 세종대에 와서 춘추관에서 漢나라 惠帝, 南朝의 宋主 蒼梧王의 서술례 즉 『漢書』, 『南史』, 『資治通鑑』, 『通鑑綱目』의 서술을 토대로 廢王禑, 廢王昌이라 하고, 기사 서술에는 史草대로 王, 上이라 써야 한다고 주장하여 세종의 허락을 받았다. 세종 31년에는 편년체에 앞서 기전체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에 공감대가 형성되어 결국 기전체 『고려사』를 먼저 편찬한 뒤 지금 편찬과정에 있는 편년체 『고려사』는 그 뒤에 교정하여 출간하기로 결론이 났다. 이때 우왕 창왕의 칭호 문제가 재검토되어 『漢書』의 王莽전과 같이 辛禑·辛昌 열전으로 편성함으로써 폐가입진의 정당성을 역사서에 반영하였다. 편년체 『고려사절요』에는 강목 서법에 따라 辛禑를 分註 紀年함으로써 그가 正統이 아님을 밝혔으며, 그 외 범례의 항목을 보면 강목 서법의 항목과 비슷한 祭祀, 行幸, 朝會, 災祥, 罷免, 人事 등의 항목이 있으므로 기사 선정에 그 영향이 있었다. 그리고 『고려사절요』의 대본이 된 사서는 권제 등이 찬한 이른바 『고려사전문』을 세종 31년까지 수정 보완한 고려사임을 논하였다. 『삼국사절요』와 『동국통감』의 箋과 序文 및 凡例 등은 『고려사』 편찬과 그 이후의 역사 편찬 및 사학사 지식을 종합한 글로서 대부분 『자치통감』과 『통감강목』의 영향이 짙으며 『동국통감』 범례의 절반가량은 강목 서법의 영향을 받았다. 紀年체계는 모두 강목 범례의 歲年조를 따랐다. 권근의 신라 정통론은 부정되고 삼국 無統론에 입각하여 三國紀로 편성하고 통일신라부터 新羅紀로 편성하였다. 그리고 기전체 정사, 장편 통감, 강목과 더불어 『소미통감절요』와 『속통감절요』도 언급되었으므로 이의 영향도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조선 초기 이와 같은 역사서 편찬에 강목 서법의 영향은 세종이 집현전을 설치하고 3년간에 걸쳐 『자치통감』과 『통감강목』의 주석서 즉 훈의본을 출간함으로 인해 비롯되었다고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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