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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한국음악학학회 音.樂.學 音.樂.學 제24권 제1호
발행연도
2016.1
수록면
59 - 101 (43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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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대 전반기의 평양은 기독교 선교의 주요 거점이자 선교사들의 활동 무대였기에 교회적 영향력이 상당했으며, 특히 1907년 대부흥 운동 이후 교세 의 확장은 도시문화 전반의 변화를 촉발했다. “1000명 이상 모이는 교회가 여럿 생겨나”는 등 “도시 전체가 급속하게 기독교화” 되고 있다는 여러 증언은 종교적 영향력에 힘입어 서양 음악교육 또한 활발하게 일어났음을 암시한다. 평양의 기독교 확산과 함께 근대화에 대한 열망은 많은 수의 기독교 사립학교가 세워지는 결과를 낳았다. 평양의 대표적인 기독교 미션스쿨 숭실과 숭의, 숭전은 미북장로교회 파성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로, 다수의 초기 한국 음악가들을 배출해 낸 산실이다. 20-30년대에 이르면 가창중심의 교육에서 벗어나 밴드, 오케스트 라, 합창 등의 다양한 형태의 교육이 이루어지기도 하고, 음악교재들이 출판되기도 한다. 특히, 대학에서 음악을 전공한 전문 음악 선교사들이 장, 단기로 한국에 머물며 음악교육을 실시하게 되는데, 말스베리 부부(Malsbary), 러츠(Luts, D. N.), 부츠(Boots, F. S.), 솔토(Mrs. D. L. Soltau) 등이 그들이다. 이는 보다 전문적인 커리큘럼으로 국내 음악교육의 중요한 모델이 될 수 있었음을 시사한다. 바로 이러한 선교사들의 활동이 선교기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데, 평양의 선교기지가 다른 도시에 비해 월등히 크고 집약적이었다는 점이 이목을 끈다. 120에이커에 이르는 방대한 공간에 선교사 사택, 학교, 병원, 운동장, 홀 등이 모여 있어 선교사뿐 아니라 수 천 명의 한국인들이 드나들었던 곳이다. 두터운 자본가층의 한계, 지역차별의 역사,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경험, 피식민의 현 실은 선교기지를 드나드는 평양민들을 문명에 대한 강한 열망으로 이끌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문명을 표상한 다양한 형태의 화성적 사운드가 울려 퍼진 선교기지는 평양민들의 지역적, 상황적 특수성과 만나 근대인으로서의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해 가도록 추동하는 제의적 공간으로 기능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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