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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정보
저널정보
대각사상연구원 대각사상 대각사상 제16호
발행연도
2011.1
수록면
181 - 222 (4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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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이글의 목적을 김성숙의 연구성과와 과제를 기술하는데 두었다. 김성숙에 대한 연구성과는 그 동안 꾸준히 축적되어 왔다. 하지만 여전히 표피적인 연구에 머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김성숙연구는 다음과 같이 세시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제1기는 중국관내 민족주의 좌파연구의 태동에 따른 김성숙연구 기반의 구축기(1980년대)이다. 제2기는 중국관내 민족주의 좌파연구의 활성화로 이루어진 김성숙연구의 진척기(1990년대)이다 제3기는 김성숙연구의 확대기(2000년대)이다. 김성숙연구는 제3기에 들어와서 본격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1945년 이전의 김성숙의 활동과 사상형성과정과 그 전개, 김성숙과 불교의 관계, 일제의 패망 이후의 김성숙의 정치노선과 활동 등 앞으로 확대 심화되어야 부분이 많이 남아 있다. 김성숙연구의 최대 쟁점은 그의 사상과 정치적 지향점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이다. 그동안 역사학계에서는 공산주의자라는 관점에서 그에 관한 글이 발표되어 왔다. 특히 한상도는 그의 임정참여를 ‘사고의 대전환’이라고 평가하였다. 이는 공산주의자에서 민족주의자로 변화되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필자의 주장은 김성숙은 결코 공산주의자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필자의 결론은 무엇보다 3.1운동 참여도 한용운 등 불교계인사들과의 교류의 결과였다는 점에서 알 수 있지만 한 사람으로서 정신세계가 형성 될 시기에 강렬한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승려생활을 하였다는 사실에 따른 것이다. 김성숙이 1923년 북경에 도착하여 불교승려들과 가장 먼저 만든 단체가 재연경조선불교유학생회였다. 이는 그가 불교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는 의미이다. 그는 이들 승려와 더불어 학생구락부․반역사․창일당을 주도하였다. 이는 승려들이 1920년대 중반의 북경 한인학생들의 민족운동을 이끌었다는 반증이라는 데서 불교사뿐만 아니라 한국민족운동사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이처럼 불교는 그에게 가장 영향을 끼친 사상임이 분명하다. 김성숙사상의 종착역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종교의 자유와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민족주의였다. 때문에 그는 민족주의 좌파의 합동을 넘어서 일제에 대항하기 위해 민족주의의 기치 아래로 전민족의 단합을 갈구했다. 그 결과 민족주의 우파 일색의 임시정부를 새롭게 태어나게 하여 민족주의 좌우파의 대동단결을 이끌어냈던 것이다. 국권회복 후에도 김성숙의 민족주의는 극좌ㆍ극우세력이 민족을 갈라먹는 상황에 맞서 여운형과 더불어 이른바 중간파를 이끌었던 원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극좌 · 극우 세력이 분단과 6.25비극을 초래하였던 것이다. “6.25는 무가치한 일로 남북한 집권자들은 각각 자기네가 한 행동과 주장이 옳다고 하면서 기념식을 거행하고 있다. 멀리지 않은 장래에 6.25의 진정한 비판을 내릴 때가 오고야 말 것”이라는 그의 주장은 남북의 화합과 통일을 추진할 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러한 점에 김성숙 사상과 삶은 역사적 의미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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