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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대각사상연구원 대각사상 대각사상 제15호
발행연도
2011.1
수록면
9 - 63 (55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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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하(1872~1965)는 한국 근대 불교계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사찰인 경남 양산 통도사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던 그는 1911년 통도사 주지로 부임한 이래 10년간 통도사를 주도적으로 운영하였다. 재정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학교와 강원을 개설하고 각지에 포교당을 설치함으로써 통도사를 새롭게 변모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반면 여성과의 스캔들과 공금횡령 등의 비리를 저지른 비리 승려로 지탄을 받으며 1925년 주지직을 사임하였다. 이러한 공금횡령 사건의 배후에는 상해 임시정부와 관련한 청년승려들에게 독립운동 자금 지원 때문이라는 것이 김구하의 주장이었다. 따라서 ‘친일과 항일을 넘나든 비리 주지’로 낙인찍힌 김구하에 대한 역사적 평가의 잣대 가운데 하나가 13,000원의 독립운동 자금지원의 진실성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지주나 유력 인사들은 상호보험적인 측면에서 일회적이고 한시적으로 독립자금을 지원한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김구하는 독립운동 관련자 10명에게 자금을 지원한 점과 정확한 기억과 진술의 일관성, 그리고 13,000원이라는 거금이라는 점에서 좀더 적극적인 독립운동 지원이라 할 수 있다. 또한 1920년 5월 김구하가 주도한 동아불교회(東亞佛敎會)의 조직은 친일적 성격으로 이해되어 왔지만 상해 임시정부와 관련한 신상완 등 청년승려들과 연결된 항일운동적 불교단체라 할 수 있다. 또한 불교개혁을 주장하는 불교유신회의 청년승려들과 입장을 같이한 총무원(總務院)을 이끌었던 통도사의 김구하는 조선 총독부와 본산 주지의 입장을 강화하는 보수적인 교무원(敎務院)과 갈등관계였다. 따라서 1924년 총무원이 교무원으로 흡수 통합될 때까지 김구하는 친일적인 행태를 보였다고 보기 어렵다. 동시에 김구하는 대본산 통도사 주지로서의 권위와 권력에 의해 점차 보수화되어 간 것도 사실이다. 3.1운동 이후 사찰령 체제와 절대적 권력을 향유하는 본산 주지에 대한 비판이 본인에게도 해당한다는 사실을 망각한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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