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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정토학회 정토학연구(淨土學硏究) 정토학연구(淨土學硏究) 제16호
발행연도
2011.1
수록면
339 - 370 (3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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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의선사(草衣禪師1786∼1866)는 조선 후기 민멸 위기에 처했던 한국의 차 문화를 중흥시킨 인물이다. 그는 대흥사에 이어진 선차(禪茶)를 복원하여 총림(叢林)의 끽다거(喫茶去)전통을 회복함과 동시에 한국의 정체성을 함의한 차를 재현하여 근현대로 이어지는 차 문화의 토대를 마련했다. 초의의 다풍(茶風)은 선차(禪茶)에서 연원(淵源)된 것이다. 선차의 시원(始原)은 달마(達磨)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참선(參禪) 수행(修行)의 장애였던 수마(睡魔)를 해결하기 위해 차를 활용한 이후, 선종 사원에서는 잠을 적게 하고, 머리를 맑게 하는 차의 효능을 적극 활용하였고, 백장 회해(百丈懷海, 749∼814)가 청규(淸規)를 만든 이후로부터 차는 수행승들이 수지해야할 필수품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9세기 선종과 함께 차가 유입되어 고려시대 왕실의 비호 아래 수준 높은 유차(孺茶)와 작설차가 생산되었고, 명전(茗戰)이 유행되는 등, 송(宋)과 비견(比肩)될 정도로, 난만한 차문화를 이룩했다. 고려 말, 왕실의 사치는 차 또한 화려해져, 차가 지닌 담박함이나 검소와는 거리가 멀어졌다. 이러한 차의 폐단은 조선이 건국된 후, 차가 쇠퇴되는 요인으로 작용된다. 태종16 (1416)년 예조(禮曺)의 요청을 받아들여 왕실의 선왕(先王)과 선후(先后)의 기신재제(忌晨齋祭)에 차 대신 술과 감주를 쓰라는 조칙이 내려진 이후, 차는 점차 쇠퇴 되어, 감기나 이질을 치료하는 단방약(單方藥)으로 전락된다. 이러한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민멸(泯滅) 위기에 놓인 차를 복원, 중흥시킨 인물은 초의선사이다. 그는 차의 이론을 정립, 초의차(草衣茶)를 완성하였고, 그가 만든 차는 경화사족들의 차에 대한 관심을 이끌어낸 매개물이었다. 특히 추사 김정희((秋史金正喜, 1786∼1856)와 자하 신위(紫霞申緯, 1769∼1845), 유산 정학연(酉山丁學淵, 1783∼1859) 등은 초의가 차의 애호층을 확대하는데 영향을 미쳤고, 초의와 교유했던 경화사족(京華士族)들은 초의차(草衣茶)를 통해 우리 차의 우수성을 인식했다. 당시 금령 박영보(錦舲朴永輔1808∼1872)의 「南茶幷序」와 신위(申緯, 1769∼1845)의 「南茶詩幷序」,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편지 등은 초의에 의해 집대성된 차를 칭송하는 한편 그가 이룩한 차문화 중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드러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후일 초의의 다풍은 제자 서암 선기(恕庵善機?, ∼1876), 견향 상훈(見香尙熏, 1801∼1885), 만휴 자흔(萬休自欣, 1804∼1875), 범해 각안(梵海覺岸, 1820∼1896)에게 이어졌다. 그러나 그들은 초의가 이룩했던 차의 중흥을 더 이상 발전시키지는 못했다. 이러한 한계점은 그들의 차에 대한 안목이나 열정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근현대로 이어지는 혼란기 속에서 차의 애호층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이러한 시대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초의의 다풍은 범해의 제자 원응 계정(圓應戒定, 1856∼1927)에게 이어졌고, 원응은 다시 응송 박영희(應松朴映熙, 1896∼1990)에게 이어주어, 초의가 복원한 한국 차의 원형을 고스란히 근현대로 이어질 수 있게 하였다. 본고에서는 이 점을 주목하여 초의선사가 중흥한 차문화의 의미와 그 영향을 밝혀 보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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