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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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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정보
저널정보
불교미술사학회 불교미술사학 불교미술사학 제22권
발행연도
2016.1
수록면
57 - 95 (39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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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 용화전에서 전래되어 성산패총 야외에 전시되어 있는 석조불좌상은 편단우견 방식으로 대의를 걸치고 있으며, 보관을 쓰고 목걸이를 착용하고 있다. 또 광배에 산화천인상과 공양천인상이 배치되어있으며 팔각연화대좌가 아니라 방형 대좌에 좌정(坐定)하고 있다. 이러한 불신의 장엄 표현, 광배의 도상요소, 대좌의 형식 등의 도상적 특징을 볼 때 용화전 석조불좌상은 통일신라시대에 유행하였던 통상적인 촉지인 불상과는 차별된다. 이 논문에서는 먼저 용화전 석조불좌상을 통일신라시대 촉지인 불상들과 비교하고, 다음으로 석가모니의 성도를 상징하는 금강좌진용상(金剛座眞容像) 도상에서 비롯된 당대 보리서상(菩提瑞像)들과 비교하여 차이점과 공통점을 도출함으로써 용화전 석조불좌상의 도상적 특징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용화전 석조불좌상은 통일신라시대에 유행하였던 촉지인 불상 도상이 변용된 것이 아니라 당대 보리서상의 도상이 신라로 전래되면서 나타나게 되었다고 파악되었다. 통일신라시대 촉지인 불상 중에도 착의법이 편단우견식이거나 광배에 화불을 비롯하여 공양천인상과 산화천인상이 배치되며 대좌가 방형인 경우도 있다. 그렇지만 용화전 석조불좌상과 같이 불신의 장엄표현, 광배의 도상요소, 대좌의 형식이 서로 조합되어 하나의 도상체계를 이루고 있는 예는 없다. 따라서 용화전 석조불좌상은 통상적인 통일신라시대 촉지인 불상들과는 차별되는 나름의 도상체계를 갖고 있다고 판단된다. 한편 󰡔대당서역기󰡕에 서술되어 있는 인도 보드가야 마하보리사의 금강좌진용상에 관한 언급을 살펴보면, 금강좌진용상은 방형의 금강좌에 좌정하고 있으며 보관과 목걸이 등의 장신구로 불신을 장엄하고 있다고 한다. 또 금강좌진용상을 숭배하고 악기를 연주하거나 공양물을 헌상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이러한 금강좌진용상에 대한 서술은 중국으로 전해져서 보리서상 도상이 성립하는데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광택사 칠보대 전래 삼존불상, 용문석굴 뇌고대의 불상들, 광원 천불애 제366호, 파중석굴 남감 제44호 등을 비롯한 낙양과 장안, 그리고 사천지역의 보리서상은 모두 촉지인을 결하고 있으며 대의는 편단우견 방식으로 입고 있으며 보관을 쓰고 목걸이를 착용하는 등 불신을 장엄하고 있다. 또 광배에는 산화와 공양을 하는 천인상들이 배치되어있다. 그리고 대좌는 방형이며 그 주변에는 공양물을 헌상하거나 악기를 연주하는 등의 다양한 권속들이 있다. 물론 당대 보리서상은 용화전 석조불좌상보다 도상요소들이 훨씬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렇지만 용화전 석조불좌상의 도상적 특징인 장신구의 착용, 편단우견식의 착의법, 방형의 대좌형식, 산화천인상과 공양천인상의 도상요소가 당대 보리서상에는 모두 조합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용화전 석조불좌상은 통일신라시대에 유행한 통상적인 촉지인 불상의 도상을 변용한 것이 아니라 당대 보리서상도상이 전래되면서 성립되었다고 판단된다. 그 동안 선학들의 연구를 통해서 금강좌진용상 도상이 신라로 전래되었기 때문에 통일신라시대에 촉지인 불상이 유행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추정되었다. 그렇지만 석굴암 본존불상을 제외하면 통일신라시대의 촉지인 불상 중에서 금강좌진용상과 연관된다고 구체적으로 거론된 예는 없다. 이런 상황에서 용화전 석조불좌상을 통해 동아시아 불교문화권에서 성도한 석가모니의 참모습으로 인식되어 널리 유행했던 금강좌진용상에서 비롯된 당대 보리서상 도상을 신라에서도 재현하고자 했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조각사적 의의는 매우 크다. 그런데 보리서상 도상의 신라 전래시점과 전개과정을 밝혀줄 수 있는 불상 예는 없다. 다만 석가모니의 성도를 상징화하고 있다는 생각되는 감은사지 동삼층석탑에서 출토된 보장형사리기의 도상이 용화전 석조불좌상의 도상요소와 일맥상통한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7세기 후반 신라의 왕경(王京)에는 보리서상 도상이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최승로가 건의한 시무책을 보면, 신라하대에는 귀금속으로 불상을 장식하기도 했음을 알 수 있는데, 청량사석조불좌상과 같이 장신구로 불신을 장엄하지 않았을 뿐 착의법이나 광배의 도상요소, 대좌의 형식이 용화전 석조불좌상과 일치하는 촉지인 불상은 보리서상 도상을 변용했을 가능성을 상정해 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신라하대에는 용화전 석조불좌상 외에도 보리서상 도상을 신라 나름의 방식으로 표현한 촉지인 불상이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러한 보리서상 도상의 수용과 전개과정을 거쳐서 9세기 후반에서 10세기 전반 무렵에 용화전 석조불좌상이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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