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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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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정보
저널정보
불교미술사학회 불교미술사학 불교미술사학 제14권
발행연도
2012.1
수록면
107 - 137 (3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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錦湖堂 若效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활발하게 활동한 화승이다. 약효는 1879년 봉영사 <석가설법도>를 시작으로 1924년 마곡사 심검당 <석가설법도>에 이르기까지 100여점이 넘는 불화를 제작하였다. 이는 동시기 활동한 喆侑나 應釋, 竺演 등의 화승들과 비교했을 때 가장 많은 수이다. 또한 약효의 작품은 서울・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등 전국에 남아 있지만, 그중에서도 약70%가량이 충청도에 집중적으로 남아 있다. 약효가 활동하기 이전의 충청도의불화는 특정화승이 없이 義謙, 有誠, 尙謙 등 타 지역 화승들에 의해 제작되었기때문에, 19세기 후반 약효의 출현은 충청도 불화불사에 있어 매우 주목되는 점이다. 따라서 약효는 이 시기 불화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한 화승임을 알 수 있다. 현존하는 약효의 작품을 살펴보면, 1878년부터 1882년 무렵까지는 화업을 시작한 보조 화승 시기이며, 1883년부터 1924년까지 수화승으로 활동한 시기이다. 수화승 시기에 약효는 여러 지역으로 불화불사를 다녔으며, 그 결과 호국지장사<감로왕도(1893)>, <아미타정토도(1893)>와 같이 타 지역의 선행도상을 수용하여 작품에 활용하게 되었다. 또한 약효는 <산신도>나 <독성도>처럼 자신만의 독자 도상을 확립하고 이를 동일 작품에 활용하기도 하였다. 특히 약효의 작품은 화풍에 있어서 1890년경을 전후로 변화가 나타나는데,1890년 이전은 전통 불화를 지향하는 약효만의 독자 화풍이 나타나며, 1890년 이후 부터는 약효 자신의 화풍과 함께 서양화법이 공존하는 양상을 보인다. 하지만여전히 약효가 단독제작하는 작품에는 전통성이 강조된 약효만의 화풍이 확인되므로, 서양화법은 동참화승들의 화풍임을 알 수 있다. 1900년경 이후부터 약효는 대규모 불화불사에서 자신은 수화승으로서 모든 불화를 진두지휘하며, 몇 작품의 제작에만 집중적으로 참여하고, 나머지 작품들은이미 수화승으로서 기량이 있었던 定蓮, 혹은 文性 등에게 위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약효는 자신의 작품에 서양화법과 음영법을 지닌 화승들이 역량을펼칠 수 있는 자리를 내주어 근대기로 이행되는 불화의 교두보적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약효의 불화에 예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불화는 여러 화승들에 의한 공동 작업으로 제작되므로, 작품에는 다양한 화풍들이 나타난다. 하지만 각각의 화승들의 개성을, 특정 화풍을 공유하고 계승하는 집단의 의미인 流派(school), 혹은 畵派로규정지어 고정화하고 있다. 조선시대 18세기 이후는 화승들의 활동범위가 확대되어, 화승들간의 교류가 활발한 시기였다. 또한 화승들은 스승으로부터 수업을받은 후 어느 정도 필력이 갖춰지면 인접사찰이나 먼 외지로 다니며 불사에 참여하는 등 한 화승이 아닌 다양한 화풍의 화승들의 영향 속에서 작품을 제작하였다. 그러므로 약효의 불화에 나타나는 다양한 화풍을 모두 약효의 화풍으로 묶어 이들을 하나의 유파 또는 화파로 보는 것을 보다 신중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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