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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불교미술사학회 불교미술사학 불교미술사학 제14권
발행연도
2012.1
수록면
7 - 33 (27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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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원성왕릉의 조각이 원성왕 사후 왕릉조영과 함께 제작되었을 것이라고 여겨왔고 어느 누구도 이를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원성왕릉 조각의 경우 피장자가 확실하기 때문에 9세기 초 왕릉조각의 기준 작품으로 삼기도 하였다. 하지만 왕릉의 조각은 피장자인 왕의 사망시기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왕릉의조각은 왕릉과 함께 조성될 수도 있지만 특히 하대신라와 같은 격변기에는 동시에 이루어지기는 쉽지 않다. 다음 왕이 누구인지에 따라 상황은 크게 달라지며,많은 경우 왕릉 조각은 왕의 사후 수십 년이 지난 후 후대 왕의 정치적 입지와 여건에 따라 추가되었다. 그 대표 예가 바로 원성왕릉이다. 원성왕의 능은 사후에 바로 조영되었지만 능의 조각은 그로부터 60여년이 지난 경문왕대에 제작되었다. 이 글은 최치원이 남긴 <숭복사 碑銘>을 통해 원성왕릉 조각의 제작시기를 다시 생각해 본 것이다. 799년 원성왕 사후 기존의 鵠寺를 옮기고, 그 위에 능을 조영하는 것만으로도 공사는 만만치 않았다. 곡사를 단순히 허물기만 한 것이 아니라 1.5km 떨어진 지점으로 옮겨 새롭게 지어야 했고, 원래의 곡사 자리는 다시 터를 닦아 원성왕릉을조영하여야 했다. 당시 이 몇 가지 일을 한꺼번에 치르는 공사는 만만치 않았을것이다. 뿐만 아니라 원성왕 사후 소성왕, 애장왕대에 이르는 시기는 정치적으로혼란기여서 차분히 원성왕릉을 꾸미는 일에 몰두할 수 없었다는 점도 간과할 수없다. 반면 경문왕대의 상황은 달랐다. 경문왕에게 필요한 것은 정통성 확보였다. 헌안왕의 사위로 직계 혈통이 아니었던 그에게 원성왕이 주는 의미는 특별했고, 이를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원성왕릉을 改修하는 일과 원성왕릉의 願刹인 곡사를 중창하는 것이었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왕릉조각의 제작시기가 왕의 사망시기와 일치한다고 보는 기존의 통념은 수정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왕릉은 왕의 사후 즉시 조영하지만 왕릉의 조각은 시대 상황에 따라 많은 변수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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