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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근역한문학회 한문학논집(漢文學論集) 한문학논집(漢文學論集) 제48권
발행연도
2017.1
수록면
261 - 305 (45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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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로 사행기의 사행단은 대략 5척의 사행선에 180명 정도의 인원으로 구성되었고, 사행선의 유지보수를 위해서 工手가 동행했으며, 불의의 사고를 대비하기 위해서 사신들은 각자 외교 문서, 방물을 가지고 분산해서 승선했다. 해로 사행기는 겸행이나 동행이 일반적이었는데, 우선 황제의 생일이 겨울이나 이른 봄이었기 때문에 동지사가 성절사를 겸행하기 용이했고, 해로 사행사로 차출되는 것을 기피하는 분위기가 만연되어 사행사의 선발이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해로 사행의 항로는 1629년 이전까지는 登州를 경유했고, 이후로는 寧遠衛를 경유했다. 이때 椵島는 1622년에 東江鎭이 설치되면서 조명간 외교 교섭의 1차 관문으로서 해로 사행사들이 반드시 경유했던 장소였다. 平島는 항로상의 주요 분기처로 登州나 寧遠衛 경유 항로가 분기되는 장소였으며, 특히 인근의 老鐵山水道와 遼東淺灘는 항행상 위험성이 높아서 조선이 지속적으로 항로의 변경을 요청했던 장소였다. 조선의 출항지로 우선 安州牧의 출항지는 해로 사행기에 최초로 이용된 장소로 구체적으로는 元頭浦口로 추정되지만, 淸川江의 얕은 수심으로 일정이 많이 지체되면서 2차례 정도만 운용되었다. 다음으로 郭山의 宣沙浦는 1622년부터 丁卯胡亂 이전까지 운용되었는데, 宣沙浦의 위치를 宣川이나 鐵山으로 오인하는 경우가 있다. 또한 해로 사행도에서는 旋槎浦로 개칭되기도 하지만, 기타 문헌에서는 宣沙浦가 일반적인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마지막으로 石多山의 출항지는 丁卯胡亂 이후의 출항지로 운용되었는데, 1628년부터 1629년은 平壤의 大同江에서 출항해서 石多山으로 이동했다. 다만 大同江에서 출항할 경우 위험부담이 높고, 시일이 지체되어 1630년부터 육로로 石多山에 이동해서 출항했다. 명의 출항지로 우선 登州 출항지는 해로 사행이 시작된 1621년부터 운용되어, 寧遠衛 경유 노정으로 변경된 이후에도 2차례 더 운용되었다. 다만 1631년의 동지성절사는 登州로 입항했지만, 귀로 시에는 寧遠衛에서 출항했다. 寧遠衛 출항지는 1629년에 袁崇煥에 의해서 해로 사행로가 변경되면서 1637년까지 운용되었다. 다만 노정이 변경된 직후에 山海關의 내지가 후금의 위협에 노출되어 2차례 정도 登州 경유 노정이 이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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