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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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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고문서학회 古文書硏究 古文書硏究 제43권
발행연도
2013.1
수록면
233 - 262 (3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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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의 경우 조선시대의 섬은 ‘절해의 고도’, ‘궁벽한 섬’ 쯤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섬사람들의 학문이나 문화적 수준은 말할 것도 없고, 정치ㆍ경제적으로도 소외됨으로써 그 일상의 삶이란 극히 열악한 환경에 처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조선시대 19세기 중반기의 상황은 이와는 크게 달라져 있었다. 이 글은 19세기 중반기의 섬의 형상을 재구성하는 것을 그 일차적인 목적으로 삼고자 한다. 그리고 검토의 주된 시기는 19세기 중반이다. 이 시기 삼남의 농민들은 삼정문란의 모순과 고통 속에 내몰려져 있었다. 그러면 섬의 일상은 어떠했을까? 이것이 이 글의 두 번째 관심사이다. 한편에서는 ‘19세기 위기론’이 강하게 주장되고 있다. 그렇다면 임자도와 그 인근에서는 그 ‘위기’가 어떤 모습으로 형상화 되어 있을까? 이 또한 이 글의 관심사 밖으로 두기에는 아쉬운 부분이었다. 이 논문은 ‘임술민란’의 단초를 연 ‘단성민란’을 이끌었던 金欞의 유배일기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유배길과 유배생활 또한 결코 외면할 수 없는 문제였다. 아무튼 우리는 김령의 유배일기, 󰡔艱貞日錄󰡕을 통해 삼정문란의 모순ㆍ고통이나 위기의 징후들을 볼 수 없었다. 도리어 경제적 풍요와 문화적 渴求가 보다 더 크게 보였다. 술과 안주와 고기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고, 유생도 서당도 즐비했다. 모순의 질곡이나 위기의 황폐함보다는 도리어 희망과 활력이 더 크게 보였다. 그러나 이 같은 희망과 활력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는 밝혀내지 못했다. 어쩌면 그것은 실상이 아니라 유배객 김령의 눈에 그렇게 보였는지도 모른다. 풀어야 할 많은 문제들을 남겨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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