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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조직신학회 한국조직신학논총 한국조직신학논총 제39호
발행연도
2014.1
수록면
105 - 139 (35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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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은 종교, 문화, 사상 등에서 자유로운 나라로 일반적으로 인식되고 있다. 특히 16세기 초 서유럽의 단일한 종교인 기독교를 천주교와 개신교로 분리한 종교개혁의 나라 독일은 종교와 신학의 자유를 상징한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 1800년까지도 독일 혹은 프로이센은 개인의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개신교 국가종교 체제를 이루고 있었다. 그렇다면 “언제 독일은 국가종교체제를 폐지하고 개인의 종교의 자유를 확립하였을까?”란 의문이 들 수 있다. 현대 독일 교회사가 발만은 1848년 프로이센 혁명의 결과로 국가종교제도가 폐지되었다고 주장한다. 본 논문의 주제는 이와 같은 발만의 주장의 타당성을 검증하는 것이다. 발만은 1800년을 전후한 시기 계몽주의는 기독교에 비판적이었지만 낭만주의와 관념론은 지성인들의 신앙각성운동이었다는 이해와 더불어 1800년부터 1848년 혁명까지의 시기 역시 일반 백성들의 신앙각성운동기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프로이센 국가종교와 종교의 자유란 주제는 발만이 대변하는 교회사적 관점뿐만 아니라 유럽 정치,외교, 군사, 경제, 법률, 종교, 사상 등을 포괄하는 종합적인 관점을 요구하는 과제라고 본다. 세계사적으로 18세기 말 유럽은 영국으로부터 시작된 산업혁명과 민주주의가 점차 미국과 프랑스 등에서 혁명으로 발전했던 “혁명의 시대”이기도 했다. 그러나 프로이센은 유럽의 반혁명 반동 복고주의의 정책을 대표하는 국가로서 정치 종교적 검열을 통해 절대왕정과 국가종교체제를 유지 강화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칸트와 슐라이어마허와 같은 사상가들은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부정하는 군주제와 국가종교체제를 비판하면서도 자신들의 사상을 직설적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검열을 통과하기 위해 수사학적으로 표현하였다. 그러나 프로이센은 1813년 이후 프랑스의 나폴레옹군의 점령으로부터 해방되고 새로운 영토를 획득함으로써 백성들의 상당수가 천주교인들인 국가로 변신하여 개인의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근본 원인은 종교의 자유를 인정했기 때문이라기보다 영토 획득이라는 정치적 변화의 결과였다. 1830년 프로이센 혁명은 실제적인 변화를 이룩할 수 없었지만 슐라이어마허, 하이네, 포이어바흐, 막스와 같은 사상가들은 자유에 대한 열망을 포기하지 않고 국가종교체제의 억압에 맞서 수사학적인 저항을 계속했다. 발만의 주장과 같이1848년 혁명은 국가종교제도를 폐지하고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인정하는 정책을 펼치기도 했지만 프로이센 당국은 혁명의 위기가 지나가자 다시 국가종교체제를 복원시켰다. 결국 발만의 주장과는 달리 프로이센 국가종교체제는 1849년 복원되었으며 1850년까지도 유지되었다. 과거 프로이센 국가종교체제의 존재와 개인의 종교의 자유에 대한 부정은 기독교가 본래 지배자의 종교를 정통이나 절대적인 것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선 개인의 신앙의 결단 혹은 종교의 자유란 토대 위에서만 가능하다는사실을 재확인시켜 준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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