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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동방학지 동방학지 제162호
발행연도
2013.1
수록면
3 - 27 (25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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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파른본 『삼국유사』를 다른 여러 고판본과 비교하여, 그 특징과 위상을 살펴보고자 했다. 이를 요약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삼국유사』에는 권1부터 권4까지에는 저자가 기록되지 않고, 권5에만 國尊曹溪宗迦智山下麟角寺住持圓徑冲照大禪師一然撰이라는 저자명이 보인다. 저자의 職銜에 諡號 普覺이 포함되지 않았음에 유의하면, 일연이 國尊에 책봉되고 79세로 인각사 주지가 되었던 1285년이후로부터 84세로 입적한 1289년까지의 일연 생존 시에 『삼국유사』는 제5권까지 모두 脫稿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에는 일연의 제자 無極이 덧붙인 기록이 두 군데 있지만, 無極은 자신이 덧붙인 기록에 無極記라고 밝혀 원래의 원문과 구별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무극은 『삼국유사』를 간행‧유통시켰을 것인데, 아마 이것이 초간이었을 것이다. 물론 고려시대에 『삼국유사』가 간행되었다는 구체적 사실은 드러나지 않고 있다. 비록 고려 공민왕 10년(1361)에 작성된 전적에 『삼국유사』가 인용된 사례가 있지만, 이 또한 간행본인지 필사본인지에 대한 판단은 쉽지 않다. 조선 초의 고간본을 초간본으로 보기에는 여러 문제가 있다. 闕字와 避諱代字 등이 가장 중요한 문제로 대두된다. 조선 초기 고판본에도 궐자의 사례가 여러 차례 보인다. 파른본에는 글자를 새기지 않은 채 빈칸으로 남겨둔 것이 왕력 및 권1과 권2에서 18곳에 이른다. 고려 혜종의 휘 武자를 대신해서 虎자를 쓴 사례와 성종의 휘 治자를 대신해서 理자를 쓴 사례는 대단히 많다. 이처럼 고려시대의 피휘법이 적용된 사례가 많은 것은 고려시대에 이미 존재했던 초판본으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피휘법이 적용되지 않은 경우도 가끔 있는데, 이는 조선시대 초기 重刊時에 고쳐졌을 가능성이 있다. 조선 초에 간행된 고간본 『삼국유사』는 석남본, 송은본, 니산본, 조종업본, 범어사본, 파른본 등이 있다. 그러나 석남본은 현재 그 소재가 불명이고, 니산본과 조종업본은 권2와 권3만이 전해온다. 따라서 왕력과 권1 권2의 파른본이 갖는 의미는 더욱 크다. 조선 초기 간본 중 왕력과 권1의 경우는 오직 파른본 만이 유일하다는 점에서 파른본의 가치는 더욱 큰 것이다. 왕력은 한국 고대 왕위 계승에 관한 사료를 전해주고 있기에 중요한데, 파른본 왕력의 인쇄 상태는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그리고 임신본 『삼국유사』 기이편 고조선조의 桓國 운운은 원래 고판본의 桓因의 因을 國으로 잘못 새긴 것이었음은 파른본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다. 파른본에는 桓因의 因이 그 이체자인 𡆮으로 되어 있다. 비록 한 글자이지만 단군신화와 관련된 오랜 논쟁의 일단을 종식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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