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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동방학지 동방학지 제163호
발행연도
2013.1
수록면
183 - 210 (2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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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목적은 국민대표회의 폐막이후 창조파의 동향을 추적하고, 그들의 노력이 결국 실패하게 된 원인을 파악하는 데에 있다. 창조파와 코민테른 사이의 외교 교섭은 두 국면을 거쳤다. 첫 국면은 1923년 9월 초부터 10월 10일에 이르는 시기로서, 국민위원회 측의 5인 협상단과 코민테른 측을 대표하는 고려총국 위원진 양자 사이에 교섭이 이뤄졌다. 양측은 국민위원회를 정당 형태의 민족통일전선 기관으로 변경하는 데에 합의했다. 두번째 국면은 1923년 10월 10일부터 이듬해 2월 18일에 이르는 시기로서, 양측이 각각 후속 조치를 실행에 옮긴 시기이다. 국민위원회는 총회를 소집하여 10월 10일자 잠정 합의안을 인준하는 절차를 밟았다. 그러나 코민테른 내부에서는 조선 문제를 둘러싸고 두개의 의견 그룹이 형성되었다. 하나는 한국국민위원회를 중심으로 민족통일전선 기관을 구축하자는 보이틴스키 그룹이고, 다른 하나는 국민위원회가 그럴만한 성질을 갖추지 못했으므로 조선 내지의 대중운동에 기반을 둔 새로운 민족통일전선 기관을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쿠시넨 그룹이었다. 양자의 대결은 후자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러시아로 간 창조파 그룹이 실패하게 된 원인은 기본적으로 그 내부에 있었다. 민족통일전선을 구축하려는 주관적 지향과 민족해방운동 대열을 분열시켜 버린 방법이 상충됐다. 또한 창조파 그룹의 주체적 역량과 그들이 추구했던 목표 사이에도 모순이 존재했다. 이러한 불일치가 국민위원회에 대한 반대 여론을 낳는 근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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