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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동방학지 동방학지 제168호
발행연도
2014.1
수록면
71 - 97 (27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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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洧는 고구려 유민의 齊나라를 건국한 李納의 아버지 李正己의 從父兄이다. 그 당시 李洧가 徐州 자사가 된 것은 이정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정기가 별안간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 이납이 이정기를 세습하자, 李洧는 더 큰 벼슬을 얻을 욕심으로 당에 투항하였다. 그런 李洧를 연구 대상으로 삼은 것은 고구려 유민의 제나라가 50여 년 지속하는 동안 당은 물론이고 제나라 내부에서 연속적인 도전이 있었다는 사례를 규명하기 위함이다. 李洧가 죽은 후 徐州는 李洧의 아우 李淡에게 귀속될 뻔하였다. 그런데 李淡이 욕심이 많은 翟濟를 벗으로 두었던 것이 화가 되어 李淡의 계획은 무산되었다. 당은 李洧가 죽은 지 30여년이 지나 李洧의 자손에 대한 배려조치를 하였다. 즉 󰡔舊唐書󰡕의 「憲宗紀」의 元和 8년(813년) 8월조에, ‘庚寅, 나라를 위해 죽었으나 집안이 망한 옛 徐州자사 李洧등 11家의 자손에 대해서, 모두를 마땅히 살펴서 돕도록 조서를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李洧 후손에 대해 당이 도우려는 조치는 정치적 의도였다. 다시 말해 元和 4年 이정기의 손자 平盧․淄靑절도사 이사도가 당 태종이 하사한 魏徵의 구택을 魏徵의 玄孫 魏稠가 살림이 어려워서 저당 잡힌 집을 찾아 주려고 시도다. 이때 白季庚의 아들 白居易등이 앞장서 이사도의 제안을 강력히 반대하였다. 그 결과 이사도가 魏徵의 현손 魏稠에게 집을 되찾아 주려는 계획은 무산되었다. 백거이가 ‘齊’나라 이사도가 옛 魏徵의 잡을 찾아주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는 상주문의 전문인 󰡔論魏徵舊宅狀󰡕 오늘까지 전한다. 그렇다면 당이 제나라와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李洧의 후손을 당이 돌보려는 것은 정치적 계산이 깔린 의도다. 제나라 이납의 徐州자사 이유가 刺史보다 강력한 節度使가 되려는 욕망 때문에 비롯된 문제였다. 어찌되었건 이유가 그의 사촌 平盧․淄靑절도사 이정기처럼 악성 종양으로 삶을 일찍 마감하였다. 그러나 李洧 모반은 이납의 제나라 건국에 큰 장애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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