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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한국학논총 한국학논총 제34권
발행연도
2010.1
수록면
273 - 308 (3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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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건국 초기부터 문자를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또 2세기부터 주변 국가와 문서를 사용하는 외교관계를 형성하였다. 그리고 3세기에는 본격적으로 중국의 典籍에 있는 내용들을 인용하고, 새롭게 ‘선비[士]’의 계층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은 유교와 관련된 교육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른바 ‘麻立干期’에는 대외관계가 확대되면서 중국의 史書와 유교 經典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書籍들이 보급되었고, 불교가 전래된 이후에도 여러 가지의 경전들이 보급되었다. 이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지식인으로 등장하였고, 이러한 현상은 이후 中古期에 ‘선비[士]’로 표현되는 새로운 부류들이 확대되는 것과 연결되었을 것이다. ‘선비[士]’로 표현되는 새로운 세력들은 대체로 중앙과 지방에 거주하면서 문자를 사용하고 유교와 불교 등 선진적인 중국의 문물을 수용하였던 계층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國士로 표현되는 세력으로 발전하여 花郞徒와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활발한 활동을 수행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强首의 스승[師]은 아마도 지방에 거주하면서 문자를 사용하고 유교와 불교 등 선진적인 중국의 문물을 수용하였던 ‘선비[士]’였을 것이다. 그리고 당시 신라에서는 지방에 거주하면서 유교 경전에 능통하여 그 지역의 교육을 주도할 수 있을 정도의 ‘선비[士]’가 다수 존재하였을 것이다. ‘선비[士]’들은 문서행정과 관련된 관직에 진출하였을 것이고, 碑의 비문을 작성하는 書人 등으로 활동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外交文書의 작성으로까지 발전하여 진평왕대에 외교문서를 전담하여 작성하는 詳文師를 설치하는데 圓光이 영향을 주었으며, 이것은 삼국통일 과정에서 외교문서를 전담하여 작성하였던 强首에게로 이어졌다. 이와 같이 신라는 유교 경전의 보급이 확대되면서 이것을 섭렵한 ‘선비[士]’들이 등장한 이후에 진평왕대에는 외교문서를 전담하여 작성하는 상문사를 설치하였다. 이러한 것을 바탕으로 신라는 인재를 양성하고 관리를 선발하기 위해서 체계적인 교육기관의 필요성을 인식하였을 것이고, 이것은 결국 國學을 설립하는 결과로 나타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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