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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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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한국학논총 한국학논총 제35권
발행연도
2011.1
수록면
75 - 106 (3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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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때 수도인 개경의 상위 행정 관서로 유지되고, 조선의 新都이자 舊都를 운영하는 개성부는 처음 성종 14년(995)에 설치되어 현종 9년(1018)에 폐지되었다가, 충렬왕 34년(1308) 충선왕에 의해서 복설되었다. 이 과정에서 判尹, 判事 등으로 개성부책임자의 명칭이 바뀌었다. 조선 건국 후 개성이 조선 건국의 基命地이자, 한양의 배후 도시로서 중요시 되었다. 그러나 태조 3년에 한양으로 천도함으로써 정치 행정상의 중심지로서의 기능을상실하였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정종이 다시 개성으로 환도함으로써 잠시 그 위상을되찾았지만 태종 5년에 다시 한양으로 천도함으로써 개성은 유후사가 되었다. 이 기간동안 개성은 신도인 漢陽과 더불어 ‘兩京制’로서 그 위상을 유지하였다. 또한 고려 후기 이후 判尹, 判事 등이 설치되었던 개성부가 태종 4년(1404)에 開城留後司로 위상이 바뀌면서 그 책임자 역시 留後가 되었다. 이들의 직책이 때로는 京官職과 外官職으로 임명되다가 성종대에 와서 정리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개성부의 책임자는 外官이나 京官이 파견되는 특수한 外官으로 변화되어 갔다. 결국 개성부는 조선국초에 구도로서 유후사가 설치되었지만, 태종대 이후 성종대까지 “개성은 京都도 아니고 外方도 아닌” 지역으로, “개성부는 漢城府와 대등한 지역”으로 인식되면서 경관에서 외관, 외관에서 경관으로 그 위상이 바뀌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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