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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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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한국학논총 한국학논총 제35권
발행연도
2011.1
수록면
1 - 47 (47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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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왕대 이후 효소왕대까지 계속되는 중앙집권적정책 속에서 귀족세력의 반발은상대적으로 두드러졌다. 특히 귀족세력 내에서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정치적 균열의 모습도 배태되고 있었다. 益善 아간의 사건이나 鄭恭의 반발은 그러한 정치적 대립의 결과로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정공의 반발은 이찬 경영이 모반을 꾀할 만큼 위기의식에 따른 것이며, 그 사건과 관련이 있던 중시 順元이 파면되었다. 하지만 효소왕과 지지세력이 의도하던 대로 정치 질서 재편이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모량리를 중심으로 소외되어 있던 귀족세력은 동모제인 성덕왕과 연계하여 생존을 모색하였고 성덕왕 즉위 후 신라 귀족사회를 주도하는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 연좌되었던 순원이 성덕왕에게 納妃하며 國舅로서 화려하게 정치적으로 재기하는 등 귀족 세력은 성덕왕 즉위후전반기 정국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성덕왕은 대일 외교를 중시하던 김순정, 김원태 세력을 약화시키며 왕권을강화하였고, 진여원의 개창을 통해서는 의상계 화엄사상의 부활을,『지지』편찬 등을 통해서는 지방통제의 강화를, 금살령과 백관잠의 반포를 통해서는 群臣질서를, 유교문화의 확산을 통해서는 친왕적 관료군 형성을, 전사서의 설치를 통해서는 강력한 중앙집권을 구현하고자 하였다. 집권력을 강화시키던 성덕왕은 麗濟의 故地였던 한산주와 발해 접경지인 패강 유역에 대해 북방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는 평야지대라는 지리적 특징에 주목하여 농업 생산력 확보를 통한 국가 재정의 안정을 위한 목적에서 이루어졌다. 이를 위해 이 지역과 연고되어 있으나 삼국통일 이후 정치적으로 위축되어 있던 김유신 가문을 정치적으로 우대· 등용하여 북방 정책의 선봉에 서게 하였는데 윤중의 中侍 임명 등은 상징적 사건이었다. 발해 견제를 통해서는 당으로부터 실리를 취하는 외교정책을 전개하여 수준 높은 외교력을 보여주었다. 나아가 패강 지역의 실질적 확보를 통해 안정적인 경제적 토대를 마련하고자 당의 균전제를 모방한 丁田制를 시행하였다. 진전된 대민 지배로서 신문왕대 녹읍혁파 이후의 토지 지급여력을 활용한 조치였다. 정치적 안정을 확보한 성덕왕은 추가적 조치를 단행하였다. 균전적 성격이 강한 丁田의 지급으로서, 이미 주변국인 唐과 日本은 이미 균전제를 시행하고 있었다. 우선적으로 정전 시행이 용이한 패강 지역에서 먼저 지급되었고 이후 단계적으로 확대되어전국적으로 시행하였다. 이는 녹읍 폐지 이후 확보된 토지가 지급 여력을 뒷받침하였고, 패강 유역에서 시행상의 문제점을 파악하였기에 효율적으로 기능할 수 있었다. 정전 지급 이후 기근 등 재해 기록이 보이지 않음은 이를 반영한다. 이러한 바탕위에서부병제가 시행되기에 이른 것이고 김암의 활동은 이를 증명한 사례였다. 곧 성덕왕은 정전지급을 통해 균전제를 시행하고 나아가 부병제까지 의도한 것으로 관념적인 왕토사상을 실질적으로 현실세계에서 구현하고자 했으며, 궁극적으로는 안정된 중앙집권적 관료정치의 실현을 통한 전제적 체제를 염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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