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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민족문화연구 민족문화연구 제61호
발행연도
2013.1
수록면
171 - 208 (3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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滄江 金澤榮(1850~1927)은 쇠망하는 조선을 등지고 망명을 택했고, 渡中 이후 명망가들과 교류하며 활발한 저술 활동을 한 까닭에 한‧중 양국으로부터 공히 많은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이에 관한 연구 중에는 중국 문인의 가르침을 받았다거나 서구 문명과 유교 정신을 결합하여 근대화의 출구를 찾고자 한 계몽사상가로 변모하였다는 식의 일방적 수수관계로 규정한 사례도 보인다. 이 글은 김택영이 지은 壽序를 통해 이러한 주장이 편향적임을 드러내고자 했다. 김택영은 24편의 수서를 남겼는데, 이는 조선의 역대 문장가 가운데 압도적으로 많은 양이다. 본래 수서는 상업이 발달한 중국 明代 江南 지역에서 유행한 통속문의 일종이지만, 歸有光에 의해 應酬文字의 한계를 극복하고 문학적 생명력을 부여받았다. 김택영은 ‘震川의 아들’이라고 불릴 정도로 귀유광에 심취하였으므로 수서의 창작에 있어서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런데 그 특징을 살펴본 결과, 당대의 현실과 내면 의식을 투영하거나 상인‧부녀자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해 애정 어린 시선을 보인 점, 일화를 통해 인물과 사건을 부각하는 수법 등 귀유광의 수서와 닮은 점도 있었지만, 서사를 중심에 두고 의론을 착종함으로써 찬술 의도를 드러내거나 진지하고 엄격한 내용을 간결 명쾌하고 자연스러운 문체에 담아낸 점과 같이 귀유광의 수서에선 잘 발견되지 않는 특징도 확인할 수 있었다. 또 귀유광의 수서를 폄하한 曾國藩을 강하게 비판하였는데, 그 논리의 근저에는 문학을 학문에 종속된 것으로 보지 않는 태도와 『史記』의 ‘神韻’ ‘神味’를 준거로 삼는 창작론이 있었다. 이는 기실 조선 문단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온 것으로, 김택영이 귀유광을 높게 평가한 것도 이러한 전통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다. 김택영은 결코 19세기 조선이라는 시대와 공간을 이격하여 귀유광에게 가 닿은 것이 아니며, 봉건적 계급관념을 탈각하고 근대로 나아간 계몽사상가도 아니었다. 망명 기간 중 중국의 자유로운 학문 풍토의 영향을 받았지만 儒學과 단절하지 않았고 서양을 新學을 부정하는 모습도 보였다. 김택영 학문적 특징과 문학적 특징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면 그의 학문과 문학의 형성에 영향을 끼친 한‧중 양국의 모든 요인들이 균형 있게 고려되어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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