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석당논총 석당논총 제52호
발행연도
2012.1
수록면
287 - 322 (36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이 연구는 병자호란 후 심양에 억류되어 있었던 척화파 문신 김상헌이 그 곳에서 입수하여 조선에 귀국할 때 가져온 중국 그림 <문희별자도>에 대한 것이다. 지금은 우리나라에 전해지지 않지만, 송시열이 1675년에 쓴 발문과 19세기 초 성해응의 관련 기록, 그리고 해외 소장의 중국 작품을 토대로 <문희별자도>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알아보고, <문희별자도>에 대한 조선 문사들의 시각과 병자호란 후 조선의 사회상과의 연관성을 짚어본 연구이다. ‘문희가 아들과 헤어지다’는 뜻의 <문희별자도>는 중국 후한말의 학자 채옹(蔡邕)의 여식이자 뛰어난 문학가이고 음악가이기도 하였던 채염(蔡琰, 字는 文姬)이라는 여인이 흉노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온 이야기를 다룬 그림이었다. <문희별자도>는 원나라 때의 서화가 조맹부(趙孟頫)가 그렸고 명나라 황제인 신종(神宗)의 인장이 찍혀있는 황실소장품이었음이 기록으로 전한다. 그림에 대해 구체적으로 묘사한 기록 내용과 현존하는 작품들을 대조하여 미국 스미스대학미술관에 소장된 조맹부 전칭작인 <문희별자도>가 조선에 전해졌던 그림에 가까운 것이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광활한 산수를 배경으로 유목민의 천막 앞에 문희와 아이들, 남편 좌현왕(左賢王), 시자(侍者)들이 이별을 슬퍼하는 모습을 그린 축(軸) 그림이다. <문희별자도>를 바라보는 조선 후기 문인들의 시각은 다중적이었다. 우선 그 작품이 명의 신종황제가 애장했던 작품으로 그의 인장이 찍혀있는 점을 중시하며, 임진왜란 때 원병을 보내주었던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표상하는 작품으로 보았다. 물론 <문희별자도>는 문희가 오랜 세월 이민족 땅에서 포로로 지내며 고향을 그리워한 애절한 심경과 이후 속환되어 마침내 그리던 고향에 돌아가게 되었으나 이제는 타향에서 낳은 두 아들과 헤어져야 하는 아픔을 그린 것이었다. 즉, 이민족과 그 문화에 대한 이질감과 부적응, 고국과 문명사회에 대한 회귀 열망, 그리고 모자간의 이별의 아픔이 핵심이다. 김상헌이 심양에서 지은 시 중에는 낯선 오랑캐 땅에 억류된 처지에서 문희의 심경을 떠올리며 공감한 면도 엿보인다. 또한 명청 교체기의 중국에서도 명나라의 양갓집 규수가 청의 침략으로 집안이 전복되고 심양으로 끌려간 일이 비일비재하였는데, 그 가운데 진자점(榛子店)의 한 객사에 벽서로 사연을 적은 계문란(季文蘭)이라는 여인에 대해서는 조선의 사행원들이 그의 사연을 문희에 비유하며 저마다 시를 지어 동정하였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의 문사들은 병자호란으로 인하여 같은 아픔을 겪었던 조선의 피로(被虜) 부인들에 대해서는 냉정하였다. 실절(失節)은 성리학자들에게 최대의 오욕으로 간주되었고, 문희는 실절의 대명사로 인식되어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성해응의 기록에는 <문희별자도>가 경계를 위한 감계화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주었다.

목차

등록된 정보가 없습니다.

참고문헌 (35)

참고문헌 신청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