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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석당논총 석당논총 제53호
발행연도
2012.1
수록면
243 - 278 (3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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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창녕지역은 불사국, 비사벌국이 자리잡고 있었던 곳이었다. 불사국은 위만조선의 멸망에 따른 유이민의 남하와 청동기문화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던 토착세력의 결합을 통하여 형성되었다. 비사벌국은 불사국을 계승한 정치집단으로서, 가야의 여러나라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진한 12국 중의 하나였던 불사국이 신라에 편입되지 않고, 가야의 비사벌국(비화가야)로 발전한 것은 그 자체적이 기반이 확고했던 증거이다. 비사벌국이 신라에게 멸망한 시기는 정확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다만 費智, 比只는 고대 창녕지역을 지칭하는 지역명이며 나라이름이다. 따라서 費智가 529년 이사부가 공략한 지역이므로 창녕지역이 신라에 복속된 것은 532년 가락국의 멸망 이전으로 볼 수 있다. 창녕지역이 신라의 지배체제로 완전히 복속된 것은 555년 下州의 설치이다. 신라의 지배체제로 복속되었지만 창녕의 지정학적 입지로 인하여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계속하고 있었다. 창녕순수비에 등장하는 신라의 외위중 두 번째인 述干 관등을 지닌 2명의 촌주가 등장하고, 진흥왕이 40여명의 관료를 모아 창녕비를 건립하고 이듬해 대가야를 공격하고 있는 것은 창녕지역의 정치․군사적 역할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계성고분군에서 출토되는 ‘大干’銘文 토기의 출현은 계성지역 지배세력의 독자성을 보여주는 것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계성지역도 낙동강 서쪽으로 진출하지 못한 신라로서는 중요한 지역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고대 창녕지역의 발전과정으로 보아 그 정치적 위상은 다른 지역에 비해 우월한 것이었다. 그것을 보여주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창녕지역은 정치적 군사적 요충지였다. 둘째, 독특한 창녕지역문화가 자리잡고 있었다. 창녕식토기라고 불리는 독특한 형식의 토기문화는 독자적인 정치세력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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