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석당논총 석당논총 제59호
발행연도
2014.1
수록면
175 - 213 (39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본 논문은 세조 3(1457)~4년 국왕이 주도한 해인사 소장 고려대장경판의 인경불사에 대한 지원 형태와 국가․사회적 의도를 집중적으로 분석하였다. 이 인경불사는 세조 3년 6월부터 사전준비 과정을 거쳐 이듬해 8월 10일 해인사에서 인경본의 완성과 관련된 특별법회를 개최하면서 전체사업이 마무리되었다. 세조는 인경불사 과정에서 다양한 형태로 지원하였다. 우선, 국가의 공적인 행정조직을 지원하였다. 중앙행정기구인 禮曹 및 承政院, 지방행정조직인 경상도 관찰사 및 충청도·전라도·강원도·황해도 관찰사가 관여하였으며, 인경불사를 전담하는 특별 관료인 海印寺印經敬差官도 파견하였다. 불교기관인 禪敎兩宗都會所의 조직체계도 관여하였다. 다음으로, 상당 규모의 인적·물적 자원도 지원하였다. 宗室, 측근 공신세력, 일반 관료들과 함께 상당수의 대덕고승들이 참여하였으며, 종이·먹·黃蠟(밀)·胡麻油(참기름) 등과 같은 소요 물자도 지원하였다. 특히 인경불사에는 8,500여 명의 승려들도 관여하였으며, 경상도 관찰사가 전체 실무를 총괄하였다. 이 불사의 조직체계는 敎·俗 이원적 협조형태로 운영되어, 사업의 효율성을 확보하였다. 마지막으로, 세조는 해인사가 국가·사회적 위상을 확보할 수 있는 지원도 하였다. 인경불사에서 해인사의 住持가 주요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국가 지원으로 해인사에 舍宇도 조성하였다. 이 불사를 마무리하는 특별법회도 조정의 지원으로 해인사에서 열렸으며, 세조의 친압이 있는 菩薩戒도 해인사에 전달되었다. 특히 특별법회 때 세조의 명령으로 조성된 세조의 御眞이 해인사의 金塔殿에 봉안되기도 하였다. 세조는 인경불사 과정에서 당대 성리학적 지식인과 공신의 비판적인 견해를 잠재우는 한편, 측근기구인 승정원을 행정통로로 활용하고, 측근 공신세력들과 승려들을 전면에 배치하는 등 인경불사를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그 연유는 인경불사에 다양한 의도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세조의 인경불사 배경은 세조의 숭불정책과 好佛的 태도, 선왕·선왕후 및 죽은 왕자의 극락왕생, 國利民福, 인경본의 확보와 같은 불교적 의미와도 연관을 가진다. 그러면서도 국가·사회적 목적과 정치적 의도가 주목된다. 우선, 외교적 교섭 자원으로의 활용 의도이다. 세조 때 인출불사에서 확보된 인경본이 일본이나 琉球國 등지와 외교적 교섭과정에서 의례 하사 물품으로 활용되었다는 사실이다. 다음으로, 정통성의 확보를 통한 왕권의 안정 내지 전제화를 모색하기 위한 의도도 작용하였다. 세조는 왕권의 정통성이 취약하여 왕권강화를 위한 다양한 정책을 추진하면서 인경불사를 주도하였다. 이 과정에서 선대의 국왕과 왕후 및 조상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함으로써 선대로부터 혈연적·정치적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불교계의 지원을 확보할 의도도 있었다. 세조는 이 당시 인경한 50질 가운데 46질을 한성·경기·강원·충청·경상·전라도에 위치한 41곳의 중요 사원에 안치시키게 하였다. 이로써 세조는 이들 사원이나 불교계로부터 우호적인 지원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목차

등록된 정보가 없습니다.

참고문헌 (51)

참고문헌 신청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