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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인문논총 인문논총 제71권 제1호
발행연도
2014.1
수록면
253 - 277 (25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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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11년조에 실린 「답설인귀서」는 국내에 독자적으로 전승되고 있는 외교문서로써 신라의 대당관계를 밝히는중요한 자료로 일찍부터 주목받아왔다. 특히 「답설인귀서」에 전하는김춘추와 당 태종의 밀약 관련 내용은 신라의 백제고지 점령의 정당성과 신라․당 전쟁의 원인이 당의 약속위반에 따른 것임을 보여주는 중요한 근거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밀약내용에 신뢰를 두는 한국학계와 달리 중국이나 일본학계에서는 사료로 인용하는 경우도 드물 뿐 아니라 사료적 가치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다. 특히, 중국학계에서는 당 태종이 백제를 공격할 계획을 갖고 있지 않았을 뿐 아니라 김춘추의 청병에 전쟁 이후의 문제까지 상의했을 것으로 보지 않는다. 더구나 밀약과 관련한 내용이 중국측자료에는 보이지 않으며, 당의 고구려 및 백제 정토는 국제관계전략에 따라 진행된 기미정책이었다고 보았다. 따라서 밀약 관련 내용은 문무왕이 자기 변호를 위해 꾸며낸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에 중국학계가 내세웠던 주장들에 대해 검토해 본 결과, 구당서 에 밀약 내용을 뒷받침해 줄만한 사료가 존재함을 확인하였다. 즉, 도침이 유인궤에게 보낸 사행을 통해 늦어도 661년 무렵에는 신라와 당이 밀약을 맺었던 것으로 인식하였음이 분명하다. 또한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정벌하려 한 전략은 당 태종대 세워졌음을 확인하였다. 그렇다면 중국학계의 주장처럼 671년에 문무왕이 백제고지 점령을 정당화하기 위해 꾸며낸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무리임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밀약을 맺은 시점과 관련해 647년에 김춘추가 사행을 간것으로 보고 「답설인귀서」에 보이는 김춘추의 입당시기도 삼국사기 찬자가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개수하였을 것으로 추정한 견해가 있었다. 하지만 당 태종이 648년에 지은 온탕비나 새로 편찬된 진서 를주었음을 고려할 때, 입당시기를 조작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상의 검토를 통해, 김춘추는 648년 12월에 입당하여 당 태종을 만난 뒤, 밀약에 관한 의견을 나누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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