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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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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포은학회 포은학연구 포은학연구 제10권
발행연도
2012.1
수록면
59 - 88 (3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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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정몽주의 시호 문충의 의미와 위상을 찾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시호는 죽은 사람에 대해 국가적으로 평가하는 의미에서 제정되었다. 제정 시기는 중국 周나라 때부터로 보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세종이 1438년에 ‘周公諡法’과 이를 바탕으로 朱喜가 편찬한 「儀禮經傳通解」 그리고 「文獻通考」 등을 바탕으로 301개 시주의 「諡法」을 처음으로 간행한 것으로 본다. 본고에서는 이 「시법」의 서문이 「세종실록」에 있음을 찾아내었다. 아울러 1668년에 편찬된 이선 「諡法通編」을 분석하였다. 이 책에 실려 있는 ‘文’과 ‘忠’의 諡註의 내용을 살핀 결과 각각 12개, 7개이며, 조선의 시법은 역사적으로 태조대는 왕에 의해 좌우되었으나 성종대는 정해진 법식을 따랐고, 중종이후에는 사대부들의 요청에 의해 좌우되어 자신들이 선호하는 諡字를 마음대로 쓰는 지경에 이르렀으며, 당시에 가장 존중되는 시자가 ‘文’과 ‘忠’이었음을 확인하였다. 시주의 위상과 관련하여 ‘충’의 경우는 예를 찾지 못하였으나 ‘문’의 경우는 ‘도덕이 있고 견문이 넓음(道德博聞)’, ‘배움을 부지런히 하고 묻기를 좋아함(學勤好問)’, ‘자비롭고 백성을 아낌(慈惠愛民)’ 순으로 격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음을 밝혔다. 정몽주는 고려의 충신이요 조선의 건국에 반대한 인물이었으나 태종은 권근의 요청에 따라 충절의 상징으로 정몽주를 현창하고 ‘문충’이라는 시호를 내리게 되는데 이후 조준, 권근, 하윤에게도 같은 시호를 내리는 바 이 중에 하윤의 시주가 ‘도덕박문’과 ‘몸이 위태로워져도 윗사람을 받듬(危身捧上)’이었던 것으로 보아 정몽주의 시주도 그와 같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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