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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은학회 포은학연구 포은학연구 제11권
발행연도
2013.1
수록면
45 - 78 (3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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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가 일본에 사신으로 간 것은 1377년 9월의 일이었다. 우왕(禑王) 대에 이르러 더욱 잦아진 왜구의 침략은 고려가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였고, 이에 대한 고려의 대응은 토벌과 외교적 교섭,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1377년 7월 일본의 패가대(覇家臺)에서 사신을 보내와 왜구 소탕 계획을 알리며 고려‧일본 간의 우호 증진을 도모하고자 하였는데, 이에 대한 보빙사(報聘使)로 파견된 이가 포은이었다. 포은은 앞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표류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일본 사행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과거 경상도 안렴사(慶尙道按廉使)가 되어 현장에서 직접 왜구의 침해와 그로 인한 민생의 고통을 목도하였기 때문에, 왜구에 대한 대책이 시급함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정치적인 계략과 현실적인 위험 부담이 뒤얽힌 사행길이었지만 그는 사신으로 떠날 것을 단호하게 결심하였다. 포은은 구주탐제(九州探題) 이마가와 료슌(今川了俊)을 만나 금적(禁賊)을 요구하는 한편, 교린관계의 이해를 상세히 설명하였다. 그 결과 왜구에게 잡혀갔던 고려 백성 수백 명을 귀국시킬 수 있었다. 또한 이마가와 료슌을 비롯한 일본인들은 정몽주의 박학다식과 인품에 감복하여 예우를 다해 대접했다. 포은은 그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포로 송환을 위해 노력하였고, 그 성과로 인해 왜인들까지도 그를 칭송하고 사모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일본과의 교린관계는 지속되었고, 통신사(通信使)가 파견된 것도 20회에 달하였다. 통신사는 그들이 방문한 곳마다 서화‧시문‧글씨 등을 많이 남겼고, 귀국한 후에는 일본에서 견문한 것을 기록으로 남기기도 하였다. 이들의 견문록과 통신사일기를 한데 모아 편집한 책이 󰡔해행총재(海行摠載)󰡕이다. 포은도 일본에 갔을 때 13편의 시를 썼는데, 이것이 󰡔해행총재󰡕의 앞부분에 실려 있다. 이는 고려 때의 유일한 일본왕환기록(日本往還記錄)이다. 포은이 남긴 시와 그의 일본에서의 행적은 이후 조선 통신사들의 기록에서도 종종 언급된다. 이는 포은의 일본왕환기록이 일본에 다녀온 고려 사신의 유일한 기록이며, 그가 거둔 외교적 성과가 역사적으로도 매우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본 논문에서는 󰡔해행총재󰡕에 남아 있는 포은 관련 기록들을 검토하여, 조선 통신사들이 포은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가를 살펴보았다. 그 양상은 대체로 네 가지, 즉 패가대에서의 포은에 대한 기억, 외교관으로서의 훌륭한 임무 수행, 이국의 풍물과 나그네의 정취를 절묘하게 표현한 시인으로서의 포은, 경술과 충렬을 겸비한 문신의 면모 등으로 압축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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