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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은학회 포은학연구 포은학연구 제14권
발행연도
2014.1
수록면
45 - 90 (4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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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은 정몽주에 대한 기존 연구에서 포은은 교조적인 유학자들과는 달리 불교에 대해 호의적이었으며, 불교에 대한 이해 역시 깊다고 보았고, 불교와의 교섭·조화 등의 인식을 가지고 있어서 호불(好佛), 지불(知佛), 친불적(親佛的)인 인물로 거론되었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연구에 의문점을 가지고 포은이 남겨 놓은 시 작품 가운데 친불교적이라는 시들과 비판적인 견해를 드러낸 시들을 다시 한 번 살펴 보았다. 포은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조선 초기 태종대에 이르러 권근의 상소에서 변화가 시작되어, 포은을 송의 문천상에 비유하여 절의(節義)지사로 추증하게 되었다. 조선 초기 포은에 대한 인식은 난신과 충신의 인식이 공존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완결이 고려사의 제신전(諸臣傳) 입전이라는 것이다. 즉, 특히 반역전도 충신전도 아닌 제신전(諸臣傳)의 입전은 이러한 이중적 구도가 반영된 결과물로 볼 수가 있겠다. 포은은 중국과 일본에 사행을 다니면서 명나라의 선진 문물을 접하면서 중국 중심의 천하를 마음에 두면서 일찍부터 중국의 한족(漢族)이 이룩한 문물을 고려가 받아들여 중국과 문화적으로 동질감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자부심을 표현하기도 하였다. 포은은 이처럼 친명(親明)외교를 통하여 고려가 문화적으로 정치적으로 안정감을 이룩할 수 있다는 인식이 강하였던 것 같고, 이러한 인식의 바탕에는 성리학의 화이론적(華夷論的) 세계관도 기반으로 작용하였다. 고려말 포은의 이러한 친명외교 전략은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지속적으로 계승되어 한족이 이룩한 중화(中華)중심의 문화와 제도를 지속적으로 받아들여, 조선 후기 우리 선조들은 소중화(小中華)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포은은 우리나라의 성리학의 터전을 닦았을 뿐만 아니라 소중화 의식을 갖게 만든 원천적 정신적 토대를 만든 인물이라 여겨진다. 『고려사』 정몽주전에 나타난 포은의 주요한 업적은, 불교를 숭상하던 고려 사회를 유학을 중시하는 사회로 변모시키려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즉, 수도인 개성에는 오부학당(五部學堂)을 세우고, 지방에는 향교(鄕校)를 설립하여 교육을 통하여 유학(儒學)하는 분위기를 진흥시키려 했다. 그리고 성균관(成均館)의 교관(敎官)을 맡으면서 학자들이 모여 서로 토론하면서 성리학적 이치를 더욱 공고하게 다져나가게 되었다. 포은이 자신의 성리학적 세계인식을 관물(觀物)과 궁리(窮理)를 통해 체득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동야독춘추(冬夜讀春秋)>·<동지음(冬至吟)>·<호중관어(湖中觀魚)> 등의 작품은 춘추·주역·시경·중용 등의 경전을 읽고 자신의 삶에 적용해보기도 하고, 경전의 이치를 시를 통해 다시 음미해 보기도 하였다. 고려시대에 사찰은 종교적인 공간을 넘어서 학습의 공간이나 수양의 공간으로 널리 활용되었다. 즉, 고려시대에는 관립교육기관인 국자감이 있었지만 개경에 십이도가 설립되어 사학이 발달한 시기였다. 사학의 학습과정에서 중요한 것이 하천도회(夏天都會)였다. 즉, 십이도(十二徒)들은 제각기 속해 있던 재에서 학문을 연마하다가 여름철이 되면 개성의 귀법사(歸法寺)와 용흥사(龍興寺) 등에 모여 정기적으로 함께 모여 공부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문화적 전통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사찰이라는 공간은 종교적 의미를 넘어서서 학습과 수양, 그리고 안신(安身)의 공간 등으로 활용되었다. 스님과의 교류도 이러한 의미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 같다. 포은은 스님들에게 준 시에서 불교의 진리를 찾는 방법이나 불교 교리에 대하여 비판적 견해를 드러낸 시들이 있다. <환암권자(幻庵卷子)>에서는 우왕과 공양왕 때 국사(國師)를 지낸 보각국사 혼수(混修)에게 포은은 불교의 진리체계가 환망(幻妄)으로 귀착된다고 비판하였고, <증승(贈僧)>에서는 현상적인 자연을 버려두고 참선에 들어가는 스님의 구도(求道) 방법을 비판하기도 하였다. <고암권자(古嵒卷子)>는 고암스님의 설법이 난해하여 이해하기 어렵다고 하였고, <원조권자(圓照卷子)>에서도 포은은 원조스님에게 불교에서 말하는 도와 마음을 비유한 말이 적절하지 않다고 하였다. 이처럼 포은은 불교문화가 자리를 굳건히 하고 있던 고려 후기에, 성리학적 세계 인식으로 사상을 전환시키는데 큰 공헌을 하였고, 한족(漢族)이 이룩한 중화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중국과 문화적으로 동질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부심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포은이 당대 고승(高僧)이었고, 국사(國師)였던 혼수 스님에게 써 준 시는 포은의 불교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뚜렷이 보여 주었고, 스님에게 준 시나 고암과 원조스님의 두루마리에 써 준 시에서도 스님들의 구도(求道) 방법이나 참선 태도, 불교의 교리 등에 문제가 많다는 인식을 드러내었다. 따라서 기존연구에서 거론되었던 포은에 대한 호불(好佛), 지불(知佛), 친불적(親佛的)인 평가는 재고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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